[박병규 신부] 2월 28일(사순 제3주일) 루카 13,1-9.

예수 시대 갈릴래아 사람들, 그리고 그 사회는 정치, 사회적 긴장감에 휩싸였었다.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 간의 긴장, 자본가와 일용직 노동자 간의 긴장, 문화와 종교적 긴장은 때론 피비린내 나는 희생과 폭력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갈릴래아는, 유다 역사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강도들의 소굴’이라는 불명예를 감당해야 했다.

정치, 사회적 긴장은 누군가의 희생을 불러온다. 그 희생은 대개 기득권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몇몇 특정 계급에 대한 무차별 폭력에 기인한다. ‘을’로 규정될 수 있는 그 특정계급은 정치, 사회적으로 소외되었거나 소외되어야 한다는 기득권의 판단이 덮어씌워진 계급일 테다. 이 계급 전쟁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는 대다수의 인민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뉜다. 그 특정계급에 대해 의식없이 비난을 한다든지, 아니면 ‘왜들 저러나’ 하면서 짐짓 도인인 양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세상엔 억눌려도 되거나 소외되어도 괜찮은 계급은 없다. 또한 세상엔 하느님의 이름으로 영원히 내쳐질 수 있는 절대악이란 없다. 적어도 존재하는 것들이라면 하느님의 피조물이고 그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보살핌의 자리에서 ‘제 종류대로’ 존재함의 의미를 충분히 누릴 권리를 가진다.

세상에서 이런 저런 잣대로 ‘죄스럽다’, ‘악하다’라고 규정짓는 목소리의 이면에는 내 삶의 이기적 안위를 위해 인위적 ‘희생제물 만들기’가 횡행한다는 사실이 은폐되어 있다. 대다수의 인민들은 몇몇 불미스런 사건들을 구태여 전면에 내세우면서 그들 역시 가졌거나 가질 수 있는 불미스런 사건들을 외면하는 버릇이 있다. 희생된 몇몇에게 의식없는 비난이나 혹은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대개의 인민들은 자신들이 짊어질 정치, 사회적 책임감을 감소시키거나 제거시켜버린다. 그렇게 불미스런 사건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악으로 남겨둔 채, 우리는 서로에게 자비로워야 되고 원수까지 용서해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기득권을 유지하기위한 저들끼리의 처세술의 수준에서 되뇌이고 좋아들 한다.

▲ 포도밭 (사진 출처 = pixabay.com)

이런 맥락에서 포도밭에서 무화과나무 열매를 찾는 것은 이해될 만하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충실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미카 7,1; 이사 5,1-7 참조). 불충실은 하느님께 대한 교조적 혹은 제의적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계급 차별적 관계의 단절을 극복하지 못한 우리의 이기심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회개(돌아섬)가 불충실을 극복할 유일한 대안이다. 포도밭에서 포도송이가 아닌 무화과나무 열매를 찾더라도, 그것이 각각의 입장에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황당한 일이라 할지라도, 신앙인이라면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며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회개는 각자도생의 길을 지향하지 않는다. 회개는 제 눈에 조금 모자라고 미숙한 이들에게 세상이 덮어씌운 혼잡한 판단 근거들로부터의 해방에서 시작한다. 무작정 껴안을 수 없다면, 무조건 비판하는 일은 그만두는 게 회개다. 불쑥 올라오는 감정 따위에 흔들려서 회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예수를 따른다는 건, 민망하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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