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1. 남과 북의 차이를 넘어

2002년 9월 모 방송국의 평양 특별공연에 윤도현 밴드가 출연했다. 남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그리고 요즘도 노래방에서 자주 들리는 ‘너를 보내고’를 열창했으나 객석의 반응은 예상 외로 무덤덤했다. 순간 마이크를 잡은 가수 윤도현은 굳은 얼굴의 북측 관객 앞에서 시원한 미소와 함께 “저희 음악이 생소하고 시끄럽게 들리겠지만, 남쪽 놀새떼(북한 말로 ‘오렌지족’이라는 뜻)를 귀엽게 봐 달라”고 부탁한다. 이내 웃음이 터지고 힘찬 박수가 이어졌으며 관객들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조선중앙TV로 북한 전역에 생중계된 이날 공연을 본 많은 북한 처자들이 자유분방하고 꾸밈없는 이 미남 청년에게 매료되었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이렇듯 차이를 뛰어 넘어 하나 되는 일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오죽하면 수난 전날 예수님께서 간절히 기도하신 내용도 ‘하나 되게 하소서’(요한 17,11)이겠는가. 그런데 북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적대와 비하, 그리고 일방적 편견을 빠져나오기 어려웠던 것 같다. 북한이 우리와 다르다는 점이 유독 강조될 뿐 아니라, 굴복시키고 절멸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이 훨씬 많다. 북한에 대한 정보를 독점하면서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시켜온 정부에 큰 탓이 있을 것이고, ‘공정’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언론 보도가 이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특히 언론계에서는 ‘북한 보도에는 오보가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는데, 북한에 대해서 뭐라고 보도하든 국민들로서는 그 진위를 알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지난해 12월 천주교 주교단이 북한을 찾았다. 평양의 보육시설 애육원을 방문한 주교단과 실무진. (사진 출처=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2. 비뚤어진 눈

실제로 우리 언론의 역사에서 북한에 대한 오보 사례는 무수히 많다. 대표적인 것이 굴지의 신문사가 터뜨린 이른바 ‘김일성 피격 사망’ 오보(1986년 11월 16일), 모 통신사의 ‘강석주 북한 외무성 부상의 북한 핵무기 보유 실토’ 오보(2006년), 북한이 천안함 공격을 인정한 듯이 전했던 ‘김정남 이메일’ 오보(2012년) 등등이 그러하다. 악의적인 북한 퍼주기 논란 같은 경우는 아무리 실증적인 자료를 내밀어도 통하지 않는 블랙홀 같은 주제다.

최근 북의 로켓 발사로 촉발된 논란들도 객관적이고 차분하게 정보를 다루고 판단할 수 없도록 선전 선동으로 얼룩져 있다. 북이 쏘아 올린 비행체가 미사일이라는 확증도 없이 ‘핵 미사일 발사’를 단정하고, 그에 대해 차분하고 이성적인 대응을 논의할 틈도 없이 전격적으로 남북 화해와 협력의 상징인 개성 공단을 폐쇄해 버렸다. 이미 북에 비해 43배가 넘는 돈을 한 해 국방비로 쓰고 있고, 미국 무기 수입 세계 제1위인 현실은 아랑곳없이, 더 많은 돈과 무기를 갖추어야만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주장이 활개 친다. 남의 경제가 북을 넘어선 지 40년이 지났고, 국방비 규모와 전력에 있어서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현실은 애써 외면한다.

우리가 압박하면 중국도 북을 버릴 것이라는 환상은 한국전쟁 이래로 중국이 일관되게 ‘조중혈맹’을 끌어안아 왔다는 사실을 묻어 버린다. 1994년 미북 제네바합의에서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의 뜻을 거슬러 북한과 합의서를 만들고 경수로 건설 경비 중에서 70퍼센트를 우리에게 떠넘긴 사실은 잊어버린 채, 미국이 자국의 이익에 관계없이 우리 정부의 뜻을 따를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여전히 많다. 우리나라 무역 구조가 중국과 홍콩에서 흑자를 내서 일본에서 본 적자를 메우고 나머지로 살게 되어 있다는 사실도 외면한다. 이렇듯 정책이나 정세를 판단하기에 필요한 기본적인 정보조차도 제대로 유통되지 않는 현실에서 ‘국민의 뜻’, ‘여론’을 앞세우는 것은 헛된 일이다.

3.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고자 노력한다면

남북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합리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런 사정들은 아마도 대결과 적대감의 정서가 합리성을 압도해 버린 탓이 아닐까 싶다. 화해와 일치를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마저도 냉전 논리의 유혹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미처 헤아려 보지 못한 탓은 아닐까.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분단되어 있던 사회에서, 유독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드시고,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면서 북측에 대해 열린 자세로 다가 가셨음을 잊은 탓은 아닐까. 이제는 강경 일변도의 대북관이 미움과 적대감으로 맺힌 감정을 잠시 후련하게 해주는 것 말고 어떤 실제적 효용을 지닐지 따져봐야 할 때다. 반면 대화야말로 상대의 고개를 숙이게 하는 방법임을 실증하는 사례는 여럿이다. 일찍이 냉전의 벽을 허무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말씀을 들어 보자.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차이’에 대한 두려움이 끔찍한 테러와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는 모든 차이를 초월하는 기본적인 공통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존중하는 대화를 통해 어떤 이들에게는 매우 위협적일 수도 있는 차이가 인간 실존의 신비를 더 깊이 이해하는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95년 유엔총회 연설)

박용욱 신부(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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