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09]

어느덧 큰아이 다울이가 8살이 되었다. 8살이면 으레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나이지만 나와 신랑은 오랫동안 고민하고 잠못 이루는 밤을 보낸 끝에 다울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일단은 다울이가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워낙 완강하게 자기 표현을 하고 있기도 하고 부모인 우리 역시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는 학교에 가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니까 아침마다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거리가 만만치 않은 것부터가 고민의 시작이었다. 1년 반 정도 병설유치원에 보내면서 나는 날마다 스쿨버스에 몸을 실은 아이들을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었는데, 잠결에 억지로 어디론가 떠밀려 가는 듯 비몽사몽한 눈빛으로 거의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한창 생기발랄한 나이에 아침마다 잔뜩 시든 얼굴을 하고 하루를 맞이해야 한다는 게 나로서는 납득이 가질 않았고, 유치원에서 돌아올 때면 다울이 역시 잔뜩 지친 표정으로 짜증을 낼 때가 많아서 그것 역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 우스꽝스러운 로봇 가면을 쓰고 노는 아이들. 저 가면들도 다 다울이의 작품이다. ⓒ정청라
그런 데다가 유치원에 적응해갈수록 다울이는 조종당하는 데 길들여진 로봇 같은 반응을 보였다. "엄마, 나 이제 뭐해?", "밖에 나가서 놀아도 돼?", "이거 먹어도 돼?".... 뭐 이런 식의 질문을 쏟아내며 자신에게 뭔가 지시를 내려 주기를 기대하는데, 그런 다울이를 볼 때마다 숨이 컥컥 막혔더랬다.

결국 고민 끝에 병설유치원을 그만둔 지 일 년하고도 두 달, 다울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자기 몫의 자기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어떤 날은 뜬금없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생기지도 않은 강아지를 위해 집을 만든다고 창고를 왔다 갔다 하면서 바쁘게 뚝딱거리기도 하고, 놀이방을 새롭게 꾸미겠다며 구석구석에 있는 온갖 잡동사니를 끄집어 내어 어질러 놓기도 하고, 빈 상자를 로봇 가면으로 꾸며 동생에게 뒤집어 씌우기도 하면서, 누가 뭐라 하든 날마다 새롭게 재미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내가 다랑이를 재우는 낮잠 시간이 다울이에게는 자기만의 특별한 시간이 되고 있는 모양이다. 엄마가 잔소리를 퍼부어 자신의 행동을 가로막거나 동생이 귀찮게 따라다니며 자기가 하는 일의 훼방꾼이 되는 일 따위가 없으니 얼마나 신이 날까. 요 며칠은 간식 만드는 재미에 꽂혔는지 다랑이 좀 재우라며 안방 문을 꽉 닫고 나가 비밀스러운 몸짓으로 뭔가를 하고 있을 때가 많다.

우당탕탕 냄비나 그릇을 꺼내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뭔가를 칼로 자르는 소리, 싱크대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소리도 들린다. 도대체 또 무슨 짓인가 싶어 벌떡 일어나 달려나가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잠자코 누워 있으면 다울이가 흥에 겨워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까지도 들을 수가 있다. '뭔가에 몰입했을 때 신이 나서 절로 나오는 노래로군. 저 녀석 지금 행복하구나.' 그 시간만은 깨뜨리지 않는 게 예의다 싶어 나는 모르는 척 눈을 감고 만다.

마침내 간식 준비가 다 되면 다울이는 잠든 이들을 깨우고 싶어 안달이 난다. 큰 소리로 문을 열고 닫고, 내 귓가에 대고 "엄마, 내가 맛있는 선물을 준비했어. 빨리 일어나" 하며 소곤거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마침내 최후의 수단으로 다랑이에게 직접 "다랑아, 간식 먹자. 안 일어나면 형아 혼자 다 먹는다"라고 말을 건다. 누가 뭐 먹는 소리만 나면 귀신처럼 알고 눈을 번쩍 뜨는 먹보 다람쥐의 습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린 모두 다울이가 준비해 놓은 간식상 앞에 앉는다.

▲ 나날이 진화하는 다울이표 고구마 경단. 오늘은 쥐이빨 옥수수 팝콘까지 박아 넣어 씹는 재미를 더했다. ⓒ정청라

오늘의 메뉴는 다울이가 썰어 놓은 땟국물 줄줄 흐르는 사과 몇 조각(자르다가 거의 다 집어 먹고 몇 조각 안 남았다)과 고구마 경단! 거기에다 요상한 장난감 컵에 담긴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스도 한 잔씩 놓여 있다.

"(깜짝 놀란 척) 다울아, 이게 다 뭐야? 진수성찬이 따로 없네."
"고구마를 방망이로 찧어서 한 입에 먹기 좋게 주먹밥처럼 만들었어. 엄마 이런 거 안 먹어봤지? 내 머릿속에 갑자기 이 음식이 떠올라서 해 봤더니 내 생각처럼 아주 맛있어. 봐, 다랑이도 잘 먹잖아. 아기들도 먹기 좋겠지? 내가 가르쳐 줄 테니까 엄마도 해 봐. 어렵지 않아."
"이 주스는 또 뭐고?"
"매실 효소인 줄 알고 물에다 탔는데 아무 맛이 안 나더라. 엄마가 먹어 보고 뭔지 생각해 봐."
"아니, 괜찮아. 엄마는 이따가 먹을게.^^; 아무튼 정말 훌륭하다. 네가 만든 요리로 책 만들어도 좋겠어."
"나도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만화로 그려 볼까?"

그러더니 다울이는 먹다 말고 당장 공책을 꺼내 책 만드느라 수선을 떤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당장 하고야 마는 저 열정을 보라! 나는 다울이의 열정을 내심 부러워하며 다울이가 만든 고구마 경단을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늘 먹던 고구마를 으깨어 빚었을 뿐인데, 맛이 이렇게 또 다르다는 게 신기하다. 더 부드럽고, 더 달콤한 느낌.... 아들이 해 준 거라 더 맛있는 걸까? 난장판이 되어 있을 부엌과 이 음식을 주무르며 빚었을 다울이의 까만 손을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하지만, 그래도 맛있는 건 맛있는 거다.

아무튼 이 못말리는 열정쟁이 덕분에 내게 맡겨진 부엌데기의 사명을 새롭게 마주한다. '오늘은 뭘 먹이나?'하고 타성에 젖어 습관적으로 하고 있던 모든 일이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신나는 놀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울이가 몸소 가르쳐 주었기에....

그러고 보면 아이들은 정말 가까이에 있는 큰 스승이다. 이와 같은 큰 스승을 어찌 '공교육'이라는 이름의 경직된 울타리 안에 가둘소냐. 요즘 학교에 가지 않은 아이들에게 벌어진 끔직한 사건들이 부각되면서 학교에 안 보내는 부모들이 잠재적 범죄자인 양 취급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난 그 길을 가야만 하겠다. 내게는 의무교육에 충실히 협조해야 하는 국민으로서의 의무보다 내 아이의 생기발랄함을 지켜 주어야 할 부모로서의 의무가 더 중요하니까.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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