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평화란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이다. 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일을 잘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는 것이며,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이다.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 가는 것이다.’ 이는 박노해 시인이 온몸으로 표현한 평화에 대한 담론이다. 진실로 의미 있는 변화가 이루어지려면 세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자연스러운 변화....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의 힘을 빼는 것은 “너나 잘해!”, “잘하는 것도 있잖아”라고 한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입을 다물게 만드는 것은 너나 잘하라는 이야기다. 그것에 말문이 닫혀서 구시렁거리는 것으로 끝냈다면 용기를 내어 부족하지만 한마디를 하고 싶다.

대화가 두려워서 집안 단속은 안 하고 뭔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그럴듯한 성모당을 만들고.... 진정 성모님은 그것을 원하실까? 고 이태석 신부님은 수단에서 사목을 하면서 예수님이 이곳에 계셨다면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지으셨을까 고민했다고 하지 않았나? 아픈 이들을 돌보지는 않으면서 병원은 크게 짓고 성모님처럼 덕을 나누거나 순명하지는 않으면서 성모당을 건설하는 뜻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내가 무지해서 그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상황들이 아직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전쟁으로 피 흘리는 응급상황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병원 건물이 아니라 치료 행위일 것이다.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교회는 야전병원이 되어야 옳고 한 사람이라도 생명을 구하는 일이 먼저여야 한다. 그런데 응급치료보다는 다른 것에 치중하다가 이미 목숨을 잃어 가는 이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할 것 같다. 누구를 위하여 병원을 짓고 성모당을 꾸미고 성지를 복구하는 것인가?

 (사진 출처 = pixabay.com)

물론 신심활동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겠으나 당장 상처받은 이들을 위해서는 소독하고 꿰매고 어디가 아픈지를 먼저 보고 응급처치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닮겠다고 나선 신앙인들의 몫이니까 말이다. 치유되지 않은 관계의 단절을 외부로 드러난 피부로 포장하고 환부를 꿰매기 이전에 고름을 짜 내고 도려낼 것은 도려내어야 새살이 차오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수많은 사고방식이 무너지고 퇴색되어 가는 오늘날에도 생각을 바꾸고 쇄신하며 새로운 관점을 형성할 수 있도록 사고와 창의성에 필요한 열정을 가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꿈’을 꾸어야 한다. 꿈은 인간의 실체이기에 사라지지 않기에 진정성 있게 지속성을 가지고 인내하며 소수의 부자연스러운 결핍을 충족시키는 것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모든 이의 기본적 욕구를 만족시켜 줄 책임을 다하는 사회로 이동해야만 할 것이다.

이기심과 달리 정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각자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각자의 잠재력을 회복시킨다. 부러진 것을 치료하고 분리된 것을 재통합하고 세상의 얼굴을 재창조하시는 그리스도께 의탁하며 이 은총의 사순절에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회복시키는 꿈을 꾸며 움직여 보자.

 
 

이진영 수녀(체칠리아)
광주인권평화재단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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