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2월 21일(사순 제2주일) 루카 9,28ㄴ-36

복음은 늘 내 마음을 불편케 한다. 오늘 복음은 더욱 그러하다. 모세와 엘리야, 그 곁에 선 예수를 떠올리면서 율법과 예언자의 말씀들, 그리고 예수의 수난을 권태로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늘 불편함을 부추긴다.

오늘 복음은 모세를 율법의 아버지로, 엘리야를 예언자의 아버지로 여기며 율법과 예언서, 곧 구약의 전반이 수난받는 예수를 통해 그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해석되곤 했다. 문제는 율법을 지키고 예언의 말씀에 감동하는 대개의 신앙인들이 예수의 수난에 대해선 그리 달갑지 않은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이 불편한 건, 복음이 연결해 놓은 것을 우리의 일상이 끊어 놓고 있다는 반성에 기인한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를 만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하다고 여겨지고 내 눈 앞에 버젓이 드러나더라도 잠시 잠깐 놀라다가 다시금 우린 우리의 현실에 파묻힐 테다. 신기한 현상은 그렇게 우리 삶을 관통하는 포탄이되 파편으로 흩어졌다 사라질 테다.

그리고 우린 태연히 우린 율법의 이름으로 제 삶이 올바르길, 예언자의 말씀으로 제 삶이 하느님 앞에 공정하길 기대하는지 모른다. 어쩌면 우린 율법을 세상살이의 예의쯤으로, 예언자의 말씀을 깨어 있는 지식인의 품위 유지용 논박쯤으로 여기는지 모른다. 이런 태도가 율법과 예언서는 존중하되 예수의 수난은 밀쳐 내는, 신앙인이되 사탄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직설적으로 보여 준다.(마르 8,31-33 참조)

▲ '변모', 알렉산드르 이바노프.(1824)

오늘 복음에서 예수는 당신의 수난에 대해 얘기하고 모세와 엘리야는 그 얘기를 듣고 있다. 율법으로 무장해서 짐짓 예의 바르더라도, 사회와 세상에 돌직구를 날리듯 예리하고 개혁적인 예언의 말을 거침없이 내뱉더라도 수난 당할 줄, 수난 당함을 즐길 줄 모르면 예수를 모르는 것이고 또한 예수를 기만하는 것이다.

신앙인은 주일을 지켜야 한다며 주일 노동자에게 점잖게 꾸짖는 것도, 가난과 소외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들에게 보다 노력하라며 예언자처럼 강퍅하게 다그치는 것도, 자신의 논리와 해박한 지식으로 신앙의 가치를 재단하거나 독점하려는 것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현실의 비참함을 회피하는 일종의 계급적 우월의식의 산물이며, 실은 예수의 수난을 외면하는 우리의 본능적 욕망이 작동한 결과다.

모세는 율법과, 엘리야는 예언자와 연결하는 습관화된 인식의 틀을 넘어서야 예수의 수난이 보이고 들린다. 사실 모세는 이집트에서의 해방을 알리고 이스라엘이 구태의 습속에서 벗어나는 말씀의 길을 알려준 인물이기도 하고(신명18,18) 엘리야는 종말의 시간에 메시아를 얻어 만나는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말라 3,6-8) 또한 이 둘은 이 세상에서 떠날 때 그 죽음이 베일에 가린 듯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들의 주검은 오로지 주님께 맡겨졌다.(신명 34,6; 2열왕 2,11 참조) 어찌 보면 이 둘은 현실 세상에서의 해방을 보여 주는 인물인 셈이다. 율법의 이름으로 꽉 막혀 버린 우리의 폐쇄성을, 예언의 말씀으로 비난과 단죄의 그늘에 묻혀 버린 우리의 독선을 똑똑히 쳐다보게 한다. 그리곤 하느님을 보게 하고 듣게 한다.

구름이 일고 모든 게 사라질 때, 베드로가 원했던 그 "좋은 것" 역시 깡그리 사라진다. 그리고 남는 건, 예수의 목소리여야 한다. 그 목소리는 수난으로 이어지고 그 목소리는 하늘과 땅을 이어 놓고야 말 것이다. 예수의 수난을 이해하는 건, 수난을 제 삶의 긍지로 받아들이고 수난을 제 삶의 겸손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자의 여유에서 가능한 일일 테다. 다만 그것이 어려워 오늘 복음 또한 낯설고 불편할 따름이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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