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44]

아이들을 보면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긴다. 아이들은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왜 우는 걸까?

보통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 풀면 어렵지 않다. ‘나도 어렸을 때 이런 적이 있었어....’로 시작해서 ‘그때 내 마음이 어땠더라....’를 기억해 내면 문제의 반은 해결된다. ‘저렇게 울고불고 심각해 보여도 사실 별 거 아니었지.... 가볍게 넘기자, 추궁하지도 말며, 훈계하지도 말자’ 하거나, ‘이럴 땐 마음이 꽤 안 좋았어.... 두려움, 부끄러움, 서러움.... 그런 것들을 인정해 주자. 이해하고 풀어 주자’ 하면서 아이의 마음에 집중한다. 실로 어린 아이들은 마음이 깨끗해서 어른들이 보려고만 치면 그 마음이 투명하게 비쳐 보인다. 그리고 느끼려고 하면 오직 사랑받고자 하여, 그래서 연약하고 애처로운 그네 마음이 온갖 욕심과 몰이해로 복잡해진 내 마음속에 들어와 앉는다.
 
▲ 메리와 욜라의 썰매 놀이. ⓒ김혜율
아이라고 왜 슬픔을 모르겠는가. 저녁 노을이 비치는 하늘에 새 떼가 검은 점점으로 사라져 갈 때, 창 밖의 것들이 어슴푸레한 땅거미 속에 묻히다 결국은 어둠에 먹혀 버릴 때, 밝고 조용한 한낮, 마루에 누워 햇볕 속을 떠다니는 먼지들을 볼 때, 그리고 그때 내 것이 아닌 이런저런 소리들이 가까워졌다 멀어져갈 때, 아이들도 울고 싶어지는 것이다. 딱히 무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때, 아름답거나 익숙한 것들이 어쩐지 사라져 갈 때,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 찬 눈을 꼭 감았다 뜨며 굵은 눈물 방울을 뚝 하고 흘리는 아이를 나는 수도 없이 보았다. 내가, 내 친구들이, 어떤 꼬맹이가 그렇게 울다 잠이 들었고, 그렇게 고였던 눈물을 꼭 짜고 소매로 쓰윽 닦고는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어릴 땐 무서운 것도 얼마나 많았는지.... 지금이야 무서운 건 나의 어리석음과 게으름뿐이지만, 어릴 때는 할머니가 들려주신 옛이야기가 불 꺼진 방 천장에서 살아나 아이 잡아가는 망태 할아버지가 돼 서성이고, 늑대니 여우니 호랑이니 하는 것들이 바로 마당 밖에서 울어 대지 않았던가.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하는 변소 귀신이 한껏 무섭게 폼 잡다가 나중에 기타를 치며 ‘내 다리 내놔라 딩가딩가’하는 이야기도 내가 고등학생쯤 되고서야 웃으며 동생한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아이들의 온갖잡다한 괴물들을 항상 용맹스럽고 깔끔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이 어른 된 도리임을 깨닫는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이 “엄마, 밤 되면 괴물 나타나서 무서워”하며 벌벌 떨 때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을 정리해 보았다.
 
1. 여기서 바로 괴물 없어! 하면 웬일인지 아이가 약간 실망할 수 도 있고, 못 믿을 수 있으니 우선, 아이의 감정을 진지하게 인정한다.
 
“아~ 우리 아가, 괴물이 나타날까 봐 무섭구나~”
 
2. 그런 다음 엄마 스스로도 괴물 따위! 라는 표정으로 안심시킨다.
“그런데 괜찮아. 엄마는 하나도 안 무서워. 왜냐면 괴물은 엄마 아빠한테는 지거든? 그걸 아니까 엄마 아빠가 있는 집에는 무서워서 절대 못 들어와. ”
 
3. 그래도 엄마 아빠 없는 방구석에 괴물이 숨어 있을까 봐 기저귀 갖고 오라는 심부름을 아이가 거부할 때는 용기를 불러 일으켜 줘야 한다.

“그거 아니? 괴물은 용감한 아이한테는 안 나타난다? 괴물은 자기를 무서워하는 아이한테만 나타나. 왜냐면 자기 보고 깜짝 놀라는 게 재밌어서.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않으면 걱정 없어. 자아~ 용감하고 씩씩하게~”
 
4. 그래도 자기 안의 용기보다 무서움을 보려 한다면 다른 접근법을 제시한다.

“만일 괴물이 나타나거든 친구가 돼 보렴. 아무리 괴물이라도 친구는 괴롭히지 않거든. 친구야 안녕? 하고 말을 해 봐, 괴물이랑 친구하는 거 멋지겠지?”
 
5. 친구조차도 안 내켜 한다면 이쯤에서 괴물을 인정하지 말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대하며 무시한다.
 
“괴물? 괴물은 동화나라나 꿈나라에서만 나오지 실제로는 안 나타나. 원래 괴물 같은 건 없단다, 없어,없어~”
 
그런데 매뉴얼이라는 것이 하나 나왔으니 말인데, 위의 ‘괴물대처 5단계’는 우리 메리의 기준으로 보자면 허술하기 짝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나의 뇌리를 스치고 간다. 왜냐하면 메리는 매뉴얼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아무래도 ‘영재’인 것 같기 때문이다! 영재.... 란 누구인가? 흔히 천재를 넘어서는 인재 중의 인재요, 인간 만 명 중에 신이 허락한 걸출한 단 한 명이 아니던가.
 
그런데 수학 영재, 과학 영재, 영어 영재, 노래 영재, 피켜스케이팅 영재, 골프 영재도 아니고 매뉴얼 영재라니. 듣도 보도 못한 영재 분야이긴 나도 마찬가지다. 왜냐면 방금 내가 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후....
▲ 누나~ 내 공격을 막아 봐! ⓒ김혜율
 
메리의 특별한 능력을 감지한 건 어느 여름날이었다. 마당에서 놀다 들어 온 메리에게 나는 손을 씻을 것을 권했고, 메리 혼자 손을 씻는 것이 미덥지 못해서 곧 뒤따라갔다가 그만 눈이 휘둥그레지는 광경을 보고 말았다. 메리가 자그마치 ‘손씻기 8단계’에 따라 손을 씻고 있었다. 평소에 나는 물에 적신 손바닥에 비누칠을 하고 그걸 양 손등에 문지르는 정도였는데 메리는 쓱싹쓱싹 그 과정을 마치더니 손가락 하나하나를 뽑듯이 비누칠을 했다. 열 손가락을 빠짐없이, 그것도 능숙한 솜씨로 하더니 손바닥에 다섯 손가락의 손톱을 세우고 원을 그리며 씻고 손깍지를 꼈다 풀었다 한다.
 
그리고 엄지손가락 부위 중 사각지대를 찾아 거품을 내 주고 양 손목을 잡고 회전하듯 돌려가며 문질러 씻었다. 공공 화장실에 가면 붙어있는 손씻기 방법이구나 싶었다. 일련의 동작들은 망설임이 없었고 군더더기가 없었으나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대중적으로 배포된 손씻기 단계는 6단계에 불과!했고 메리의 것은 그것보다 적어도 2단계가 더 많았다. 인터넷을 다 뒤져도 메리만큼 깨끗하게 손을 씻는 사람을 찾아볼 수 가 없었기에 나는 메리의 손씻기 방법을 8단계로 자체 공인하였다. 유치원에서 배운 것일 텐데 메리는 1년 동안 손씻기 6단계 이상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 유일한 아이라고 메리의 담임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바로 그런 아이! 낙뢰 방지법에 대해서는 소책자를 한 권 낼 정도로 소상히 말하는데 나는 듣는 즉시 반을 잊어버릴 정도다. 벌에 쏘였을 때 대처법, 지진발생시 대처법, 화재발생시 대피법, 민방위훈련 매뉴얼, 물놀이 전 준비 운동, 유괴 대처법 등 특히 안전교육 분야에서는 빠삭하게 꿰고 있다. 유치원생 수준이 어느 정도겠지 하고 들어 보면 메리가 정리하는 매뉴얼은 항상 어떤 인터넷 검색보다 자세하고 정확했다. 그 여파는 동생 욜라에게도 약간 미치는 것 같다.
 
어느 날 메리가 욜라에게 퀴즈 하나를 냈다. 넌 절대 모를 거다라는 얼굴로 자신만만하게.
 
“욜라야, 사람 몸에 불이 붙으면 어떻게 하게?”
 
그랬더니 욜라가 별로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뒹굴어야 돼.”했다.
 
나는 그 답이 왠지 맞는 것 같아서 메리 얼굴을 쳐다보니 메리가 담담한 어조로
 
“응, 맞아.”한다.
 
뭐지? 나도 확실히 모르는 걸 왜 둘이 알고 있고 그걸 퀴즈로까지 즐긴단 말인가?
 
▲ 눈이 녹아도 썰매 놀이는 계속. ⓒ김혜율
메리는 이미 욜라에게 화재발생시 대처법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고, 욜라가 그걸 기억해 낸 것이었다. 메리는 몸에 불이 붙었을 경우 손으로 얼굴을 가린 뒤 바닥에 뒹굴어 불을 끄는 시범을 보여 주면서 불이 붙은 옷을 무리해서 떼어 내면 어째서 위험하며 가위나 칼로 어떻게 잘라 내고 하는 것까지 부연 설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철두철미할 것만 같은 메리에게도 구멍은 있다.
 
“메리야, 너 저번에 해일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줬던 것 같은데?”하고 기대를 갖고 물으니 “그건 생각 안 나.”한다. 영재가 왜 이러나 약간 당황했지만 나는 제발 응답해 다오 영재여~ 하는 염원을 담아 테스트를 계속 진행했다.
 
“그럼 메리야, 산사태가 일어났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 했지?”하고 초롱초롱한 눈빛의 내가 물었다. 그러자 메리는 기대에 부응하지 않기로 아주 작정을 한 것처럼 “그것도 모르겠는데.”한다. 아주 성의가 없다.
 
흠, 어쨌든 매뉴얼 영재 굳히기는 실패다. 하긴 애가 도서산간 지역에 사는 것도 아닌데 왜 산사태와 해일을 걱정해야 한단 말인가?! 하하하!
 
만일 그걸 일부러 숙지하고 있다면 영재인 내 자식이 부담스러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래, 나는 메리가 매뉴얼 영재가 아니라도 좋다. 메리가 지금의 메리인 것으로 만족한다. 앞 머리카락을 젖히면 나타나는 메리의 백만 불짜리 이마, 그 위에 손을 얹은 채로 고백을 쏟아 낸다. 까칠하지만 표현하지 않는 큰 사랑을 품은 아이,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은 자기 차지로 돌리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전형, 승부욕이 하늘을 찌르고 집요함이 땅을 파고 들어가는 협상 테이블의 CEO, 커서 과연 미인이 될지 사뭇 걱정인 얼굴 까만 시골 소녀, 자기 전 기도할 때 하루 중 재미있었던 일이 언제나 넘쳐나는 열정 소녀,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와서 엄마 아빠의 첫사랑이 된 아이! 나는 그런 메리를 사랑한다. 다 큰 것 같았는데 유치원 가방을 메고 탈래탈래 뛰어가는 뒷모습이 영락없이 일곱 살 꼬마인 메리를 눈물 나게 사랑한다.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4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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