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온 세상을 꽁꽁 얼려 버릴 듯 추운 날씨임에도 졸업식이다 입학식이다 해서 제법 활기 있는 요즘이다. 아직 학교 끝날 시간이 아닌데도 길거리에서 종종 교복 입은 학생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정말 졸업이 얼마 안 남긴 했나 보다. 그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학교, 교실, 친구들, 선생님, 교과서, 종소리 등 근 몇 년간 잊고 살았던 향수 어린 단어들이 떠올랐다. 특히 ‘선생님’이란 단어. 그렇게 입에 달고 살던 단어였는데 몇 년간 소리 내어 부를 일이 거의 없었던 그 단어가 와 닿았다. 대학에서는 ‘교수님’이란 단어로 대체됐지만 그 두 단어가 주는 느낌은 정말 다르다. 그 시절의 우리에겐 엄마가 있었고 아빠가 있었고, 선생님이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누군가가 그렇게 묻는다면 꽤 고민될 것 같은데, 머릿속에 제일 먼저 퍼뜩 떠올라 지워지지 않는 한 분이 계신다. 그렇게 가깝게 지내지도 않았고 오랜 시간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고 딱히 특별한 사건이 있지도 않았다. 그저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참 잘 어울리는 분이셨다고 기억된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이라는 가사를 되뇌면 떠오르는 분. 그러나 동시에 참 인기 없는 선생님이었다. 친구들은 선생님의 문학 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확실히 소위 말하는 ‘잘 가르치는’ 선생님은 아니었다.

그분은 그 귀하디 귀한 고3 수업시간에 시험에는 나오지도 않는 시를 외우게 하시고 상으로 초코파이를 돌리셨던 분이었다. 그런 분이 실력 있고 인기 있는 선생님으로 기억되긴 어렵다. 그러나 그분은 내가 만난 최고의 스승님이셨다.

▲ KBS 드라마 "학교 2013"에 교사로 등장하는 인물들.(이미지 출처 = KBS 홈페이지)

왜 교권이 추락하고 있는가

요즘 중고등학교 이야기가 뉴스에 나왔다 하면 거의 교권추락 이야기이다. 몇 년 전부터는 국회에서 교권보호 이야기가 오갔고, 지난 연말에는 드디어 교권보호법이 의결되어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 법에 따르면 앞으로 교권 침해 사건은 교육 당국에 반드시 즉각 보고되어야 하며, 피해 교원에 대한 전문 치료, 가해 학생에 대한 특별 교육 및 심리 치료가 시행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법안에는 ‘왜’가 빠져 있다. 왜 교권이 추락하고 있는가에 대한 충분한 성찰이 보이지 않는다. 피해 사례 발생 뒤 대처법은 있어도 피해를 막기 위한 방안이 없는 ‘외양간만 고치는 법안’을 좋은 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법안을 통과시킨 우리 국회의원이 주로 50대인 것을 감안했을 때, 지금 우리 사회에서 왜 교권이 무너지고 스승과 제자가 서로 적대감을 갖게 되는지를 알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왜 교권은 추락하고 있는 것일까? 학교가, 사회가 요구하는 ‘선생님’의 자격과 조건이 더 이상 ‘가르쳐 올바르게 이끌어 주는 사람’이라는 정의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 선생님 잘 가르쳐?”라는 말이 자주 오간다. 이 말을 풀이하면, 시험을 위해 내가 배워야 할 내용을 최소화시켜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있는 교사냐는 것이다. 수업 시간에 딴 소리 안 하고 시험이랑 관련 없는 ‘시간 낭비성’ 숙제를 내지 않고 필요한 것만 족집게처럼 잘 골라 주는 선생님. 요즘 애들이 맹랑하고 인성이 못돼서 이런 선생님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그런 선생님이 내가 잘 수 있는 시간을 5분이라도 더 늘려 주고, 내가 혼자 머리 싸매고 공부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 줄 테니 중요한 것 아닌가? 학생에게 이것은 거의 생사의 문제다.

또한 성적별 반 편성이나 수준별 학습이라는 시스템은 학생 스스로가 자신을 서열화, 등급화하게 하고, 이에 대한 스트레스는 선생님에게 돌아가게 된다. 학생 입장에서는 학교가 선생님이요 선생님이 학교이기 때문에 그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된 것이든 간에, 학교라는 틀 안에서 느끼는 부당함과 분노가 선생님의 몫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사실 학교가 참 교육의 장이고 학생을 훌륭한 사람으로 길러 내기 위한 곳이라는 개념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학생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좋은 학생이 될 수 있는지. 이렇게 만들어진 학교와 선생님을 향한 무의식 속 적대감이 학생의 탓일까?

존경의 결여. 선생님은 그저 ‘을’이 된다

이렇게 성적으로 ‘나’라는 존재의 가치가 매겨지고,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나의 사회가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는 가운데, 스승에 대한 존경이 꽃피는 교실은 사치스럽다. 내 가치를 올리는 데 필요한 유능한 선생님이 필요할 뿐이다. 그분의 실력에 감탄할 순 있어도 동시에 그분의 인격과 사상을 존경하긴 힘들다. 선생님의 인격과 사상은 효율적인 지식 전달 과정에서 불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존경이 없는 교실이 얼마나 슬픈 결과로 이어지는가? 입시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최고 목표가 된 학생에게, 별 볼 일 없는 대학을 나온 선생님은 어떤 존재겠는가. 기간제 교사는 얼마나 볼품없는 존재겠는가(기간제 교사에게 특히 학생으로부터의 폭행이 많이 발생하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다). 내게 필요한 정보만 제대로 전달해 주면 되는 사람이 나를 가르치려 들 때, 당신이 뭐라고 내게 이래라 저래라 훈화를 하냐는 검은 마음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학생이 선생님을 존경하기 힘든 학교를 만들어 놓고는 우리 보고 요즘 애들이 인성이 못돼 먹었대요! 이에 대해 무슨 대답을 할 수 있는가.

구두 수선공이 세상을 움직인다던 그 선생님은 오늘날의 학생에게 좋은 스승일까

그때 그 선생님은 새로운 시를 들고 교실에 들어오실 때마다, 스승으로서 당신의 자존과 우리 가련한 학생들의 현실 사이에서 큰 고민을 하셨을 것이다. 초코파이는 우리를 어떻게든 참되고 바른 길로 이끌고자 하신 그분의 발버둥이었다. ‘힘들지. 이거라도 먹고 부디 이 시를 기억해 주겠니’. 그 시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지금까지도 불현듯 떠오르는 시 한 구절과 선생님의 말씀이 있다. 결국 이 세상은 구두 수선공의 땀 한 방울 덕에 돌아가는 것이라고. 오늘도 새벽부터 출근을 하고, 휴지를 줍고, 밥을 하고, 거리를 쓸고, 구두를 닦는 무수히 많은 작은 톱니 바퀴들 덕에 이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며 인간과 노동의 존엄을 말씀하시던 그 선생님.

짜증 섞인 눈으로 오늘은 제발 진도나 쭉쭉 나가자는 눈빛으로 선생님을 원망했었는데, 그분의 그 말씀이 오늘의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내가 한없이 쓸모 없는 인간처럼 여겨질 때면 휴지 한 장을 줍거나 방 청소를 하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작은 톱니바퀴가 되었다는 생각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우리가 부모님을 사랑하는 까닭은 그분들이 더없이 훌륭한 양육자이기 때문이 아니듯 우리가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은 그분들이 기막힌 시험 족집게이기 때문이 아니다. 선생님을 존경하고 싶다. 선생님을 마음껏 존경할 수 있는 교실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교권보호법에는 이러한 학생들의 염원이 담겨야 한다. 그 선생님이 고뇌의 초코파이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그날, 교권은 더없이 숭고한 가치가 되어 있을 것이다.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