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2월 14일(사순 제1주일) 루카 4,1-13

대개의 신자들은 사순절의 시작을 회개와 절제의 결심으로 장식한다. 매년 반복되는 경험칙은 회개와 절제의 희화화다. 단식과 금육을 이유로 효소를 먹고, 절제와 인내를 위해 담배와 술을 끊어 본다. 일종의 희생일 수 있으나, 실은 그리스도교적 나눔과 연대의 의미를 상대적으로 축소 혹은 제거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힘들다.

오늘 예수가 광야에서 유혹받는 이야기는 성령으로 가득 찼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또한 이야기 속에 들리는 예수의 모든 말은 신명기에 등장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이 광야에 머물 때 들은 하느님의 말씀들이다.(신명 8,3; 6,13.16 참조) 말하자면 예수는 자신이 유혹을 받되 자신을 철저히 비웠고, 하느님으로 채우며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한 채 사탄과 만나고 있다. 그러나 저 옛날 이스라엘은 달랐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이란 시간을 보낼 때, 이런 저런 삶의 고단함과 피폐함에 하느님께 저항했다. 예수는 광야의 40일을 통해 이스라엘의 저항을 전적인 순종으로 바꿔 놓는다.

악마는 하느님과 대립된 개체가 아니다. 유다 전통에서의 악마는 하느님에 속해 있는 존재로 비난자이자 고발자다.(1사무 29,4; 2사무 19,22; 1열왕 11,14.20.29; 시편 109,6 참조) 유일신 사상이 뚜렷한 유대 사회 안에서 하느님과 대립될 수 있는 신적 존재나 공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악마에게 유혹을 받는 예수는 하느님 밖의 세상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다스려지는, 하느님의 세상에 여전히 머물고 있다. 그 세상은 달콤하고, 거룩하며, 순도 100퍼센트의 정의만 가득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매 순간 쓰러지고 넘어지며 매달리고 집착하는 우리 일상의 지난한 역경과 실수가 뒤범벅된 땀의 현장이다. 악마는 늘 ‘다음 기회’를 노리며 우리의 일상에 함께한다. 그게 바로 하느님의 세상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살아갈 세상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오늘 복음에서 악마는 세 가지 유혹을 제시한다. 필요한 빵과 세상의 화려함,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시험.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현실을 전제로 한 비현실적 허구라는 데 있다. 이를테면, 빵은 필요하되 돌이 빵이 되도록 하는 건 현실을 넘어서는 이야기다. 세상의 화려함을 다 내어 준다는 것은 세상의 화려함이 존재하되, 그 모든 게 한 개인만을 위해 존재할 수 없다는 엄연한 상식을 피해 간다. 하느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타자에 대한 독선적이고 편향된 판단을 불러오며 그건 있는 그대로의 타자에 대한 불신과 왜곡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숨겨 버린다. 사탄이 예수에게 던진 유혹들은 결국 현실에 대한 기만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거짓의 달콤함이다.

오늘 복음은 세상의 ‘필요함’에 대해 부인하는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빵이든, 화려함이든, 또한 서로에 대한 시험이든 세상 안에서는 필요하거나 요구되고 있으니 말이다. 예수가 광야에서 체험한 것은 현실적 필요함에서의 해방이다. 대개의 신자들은 이 체험을 현실을 거슬러 저 하늘, 발이 땅에 닿지 않는, ‘하느님과 나만’ 누릴 수 있는 ’안빈낙도’의 덕목쯤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는 현실을 그렇게 외면하지 않았다. 현실의 ‘필요함’에 온전히 내어 맡김으로써 현실에 저항했다. ‘이것만이다’라는 세상에, ‘그것 말고 다른 무엇도 있다’라고 말하는 예수는 목적 없이 미친 듯 달음질치는 세상에 크게 한번 숨 쉬어 보라고 다그치는 것이다. 돈과 성공만이 전부인 세상에 ‘또 다른’ 꿈도 꿀 수 있다는 당연한 권리를 되짚는 예수, 공생활 시작에 이미 드러난 그의 남다른 현실 인식이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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