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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의 뒤끝, 나물 볶음밥[부엌데기 밥상 통신 - 08]

우리 신랑은 장손이다. 시어머니 살아 계실 때만 해도 장손 며느리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어머니 하시는 일을 돕는 시늉 정도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다울이가 돌쟁이 됐을 무렵 시어머니가 뇌출혈로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마치 비바람 몰아치는 밤에 지붕이 훌렁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고나 할까? 그때부터는 바람막이 하나 없이 맨몸으로 나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일 년에 두 번 명절에 지내는 차례 상을 내가 손수 차려 내야 하는 것만도 큰 부담인데 거기에 시아버님 제사, 시어머님 제사, 시할아버와 시할머니 외 기타 등등 통합 제사까지.... 그리스도교 집안이라 결혼 전에는 제사상 차리는 걸 구경조차 못했던 나에겐, 내 실력으로 풀기 어려운 숙제를 떠맡은 기분이었다.

"부담 갖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돼요."

제사상을 차려 내기에 앞서 걱정이 많았던 나에게 신랑이 던진 말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은근슬쩍 바라는 게 많았다. 아무리 그래도 식혜나 떡은 손수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은근한 압박을 가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처음 몇 번은 차례 상이나 제사상을 준비하면서 투닥거리며 싸우기도 했고, 신세한탄을 하면서 음식 준비를 한 적도 있다. 더구나 집안 어른들까지 모시고 상을 차려야 했을 때 떡이 안 쪄져서 노심초사하기도 했고, 나물 반찬이 엄청 짜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던 등 실수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 남겨진 것들의 따끈한 부활, 나물 볶음밥! ⓒ정청라

하지만 그것도 벌써 옛일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상을 차려 내고 있다. 이번 설에만 해도 임신 8개월의 무거운 몸으로 각종 나물거리를 손질해서 볶고, 시루떡을 찌고, 식혜를 했다. 생선을 쪄서 굽고, 설날 아침 일찍 떡국 끓일 만반의 준비를 해 둔 것은 물론 심지어 만두까지 빚었다.(다만 전 부칠 때 나는 기름 냄새가 싫어 전 올리는 건 패스, 그 정도는 조상님들도 이해해 주시겠거니 하고.)

눈물 젖은 손으로 음식을 장만해 온 그간의 세월 동안 어느새 내게도 음식 장만하는 수고를 기꺼이 내 몫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기고, 그런 만큼 어느 정도 실력도 쌓이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뿐인가. 과일이나 생선 외에 모든 재료는 장을 보지 않아도 될 만큼 자급 능력이 높아졌기에 상을 차려 놓고 보면 뿌듯하고 벅찬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깨소금이나 팥고물 같은 양념 한 톨에까지 신랑과 내 정성이 잔뜩 묻어 있기에....

그런데 말이다, 음식을 장만해 보면 의외로 나물 반찬이 가장 공이 많이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이번에 토란대, 고사리, 무나물을 했는데 특히 토란대나 고사리 같은 묵나물은 미리 물에 담가 불리고, 삶아서 우렸다가 박박 씻어 아린 맛을 빼내는 등 잔손이 많이 간다. 나물이 물러지지 않게 적당히 삶아 내는 요령도 필요하고, 양념 국물이 너무 질척해도 안 되고 너무 없어도 안 되는지라 그걸 조절하는 것도 어렵다. 더구나 깊고 고소한 맛을 내기 위해 다시 물을 내서 넣거나 생들깨를 갈아 넣는 등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 보면 나물 반찬이야말로 명절 음식의 주전 투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 밥상을 차려 내면 어떤가. 다른 기름진 음식의 기세에 눌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미미하다. 다른 때 같으면 맛깔스러운 나물 반찬 한 가지만 있어도 부족함을 모르는데 온갖 화려한 먹을 거리가 넘치는 명절상에서만큼은 조연 신세를 면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나물이 빠지면 상 전체의 균형이 무너지니 은근슬쩍 빼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하여, 명절이 끝날 무렵이면 나는 남은 나물 반찬부터 챙기게 된다. 공 들여 만든 걸 찬밥 신세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볶아 상에 올리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나물 볶음밥을 해 먹으면 아주 훌륭하다. 명절 뒤끝의 나른한 입맛을 잡아 주는가 하면, 나물도 한꺼번에 왕창 먹을 수 있으니까.

우리집 나물 볶음밥 만들기 순서는 이렇다. 먼저 재료 준비! 명절 음식 장만하면서 남은 자투리 채소(양파, 당근, 버섯 등)와 나물, 백김치를 송송 잘게 썬다. 프라이팬을 달구어 들기름을 두르고 채소, 김치, 각종 나물의 순서대로 넣어 볶다가 김치가 익었다 싶으면 찬밥을 넣고 함께 볶는다. 그런 다음 깨소금과 김가루를 뿌려 넣으면 끝!(식성에 따라 김치 국물이나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어도 좋다.)

격식 차릴 것도 없이 팬 채로 밥상에 올려놓고 식구들끼리 숟가락을 부딪히며 먹으면 수북하던 볶음밥 더미도 금세 줄어든다. 볶음밥 안에 이것저것 다 들어 있으니 반찬은 동치미 한 그릇 정도면 된다. 며칠 동안 그럴듯한 상을 차려 내느라 지친 몸은 그렇게 숨을 고르고, 명절 후유증으로 '먹는 것도 귀찮아. 만사가 다 귀찮아.' 하던 입맛이 그렇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거다. 다시금 일상의 소박함이 이끄는 잔잔한 기쁨 속으로 빠져들면서 말이다.

명절이 기쁘고 흥겨운 날임은 분명하지만 너무나 자주 찾아온다면 얼마나 피곤할까? 우리 몸속의 밥통은 얼마나 힘이 들까? 설 명절의 마침표를 나물 볶음밥으로 찍으며 나는 다시 깊고 고소하고 담담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다. 더불어 내가 차려 낸 음식이 무엇 하나 허투로 버려지지 않고 알뜰하게 갈무리 된 데 대한 보람을 가슴 뻐근하게 느낀다.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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