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성욱 선생의 학교]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큰 행운이었다. 원래 타 시도에서 전입 온 교사들은 원하는 곳으로 갈 수가 없기 때문에 2년 정도 발령 내 주는 곳에서 근무하고 혁신학교로 진입하는 게 목표였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작은 학교 살리기 운동을 펼치고 매우 드물게 분교에서 본교로 승격되어 혁신학교를 준비하는 학교로 단번에 발령을 받았다. 혁신이라는 것이 과연 어떻게 다른지, 이 학교는 그동안 내가 겪어 왔던 학교와는 어떻게 다른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었지만 솔직히 발령을 받은 당시에는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교생이 1000명이 넘고 가장 최신 시설이 갖춰져 있던 곳, 심지어 교사용 화장실이 각 층마다 있던 곳에서 근무했는데 새로 발령받은 곳은 전교생 90여 명, 2층짜리 전형적인 옛날 학교의 건물, 교사용 화장실이라는 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완전한 시골학교였다. 교육청에서 발령장을 받고 처음 학교를 찾아가는데 내비게이션을 따라 산속으로 돌고 돌아도 학교가 나오지 않아 길을 잃은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며 가야 했고, 어쩌다 야근을 하게 되더라도 배달이 가능한 음식점이 없어 모든 걸 학교에서 해 먹어야 했고, 버스도 하루에 3-4번밖에 들어오지 않아 차가 없으면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도시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나에게 깜깜한 어둠, 까마귀, 고라니, 독수리, 각종 곤충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시골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발령 초기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한 노비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그를 부르더니 가지고 있던 노비문서를 태워 버리고는 너는 이제 자유라며 짐을 챙겨 떠나라고 한다. 노비는 얼떨떨하면서도 신이 나서 짐을 챙기고 대문을 나선다. 그러나 대문을 나서자마자 노비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가진 것도 없는데.... 당장 뭘 할 수 있지?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고 아는 길도 없고 새롭게 살아가는 방법도 모른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어디까지 해서는 안 되는지, 나에게 주어진 권리와 자유는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심지어 노비는 그냥 노비로 사는 게 편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 초등학교 4학년 수학과 교사용 지도서. 수업 내용을 대본 형식으로 안내하고 있다. ⓒ채성욱

내 처지가 딱 이랬다. 10년의 교사생활을 하면서 내내 들었던 말은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뭐라도 물어보면 그런 걸 도대체 왜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선생님이 알아서 하세요’라고 한다. 도대체 뭘 어떻게 알아서 하라는 건지,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지 멀뚱멀뚱 서 있으면 그제야 ‘나는 이러저러하게 했으니까 너도 알아서 해 보고 오라’고 한다. 그동안에는 작년 자료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작년에 어떻게 했었는지 대충 훑어보고 조금씩 수정하기만 하면 됐었는데 여기서는 작년 자료가 있다고 해도 그저 참고만 될 뿐 내가 하나하나 알아서 만들고 계획해야 하는 것이었다.

수학여행의 경우, 그동안 내가 있었던 학교는 수학여행지가 경주, 제주도 등 교장이 원하는 곳으로 정해져 있었다. 게다가 숙소, 버스 회사 등도 사실상 교장이 시키는 곳으로 이미 다 정해져 있었다. 사전 답사라는 것이 있기는 했지만 그냥 요식 행위일 뿐, 교사가 하는 일이란 그저 정해져 있는 것을 마치 정해져 있지 않았던 것처럼 꾸미거나 일상 해 왔던 것을 살짝 날짜만 바꿔 올해도 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학교는 완전히 달랐다. 수학여행을 어떻게 할 것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 결정하는 방법 자체가 모두 교사에게 주어져 있었다. 내가 전년도 6학년 담임이었던 선배의 도움을 받아 실시한 방법은 교사가 간단한 가이드라인만 제시하고 수학여행의 모든 것을 학생들의 프로젝트 학습으로 스스로 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제시한 가이드라인은 버스로 가는 시간이 3시간을 넘지 말 것, 비용이 30만 원을 넘지 말 것, 안전한 활동이 될 것의 세 가지 뿐이었다. 그리고 16명의 아이들을 4명씩 4개의 모둠으로 나누고 각 모둠이 1주일 동안 수학여행지, 숙소, 먹거리, 교통, 이동 코스, 예상 비용 등 수학여행의 모든 계획을 세워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도록 했다. 네 모둠의 프레젠테이션이 모두 끝난 뒤 아이들이 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수학여행을 결정했고 교사는 숙소 및 교통편 예약 등을 도와 수학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수학여행뿐만 아니라 다른 다양한 체험학습들도 어디로 얼마나 갈지 아이들과 함께 논의하고 교과서를 훑어보고 준비해서 올해 우리가 갈 곳, 할 것 등을 정했다. 작년에 갔던 곳은 그냥 참고만 할 뿐, 그해 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곳, 아이들이 원하는 곳 등을 자유롭게 정해서 계획을 세워 가면 되는 것이다.

체험학습뿐만 아니라 학교의 거의 모든 일이 교사와 아이들이 알아서 계획하고 준비하고 실시하고 반성하며 진행되었다. 그렇게 어찌어찌 한 학기가 끝나가자 이번에는 교육과정 평가회를 하자고 했다. 인천에서 했었던 교육과정 평가회는 그냥 서류상으로 도대체 왜 쓰는지도 모르는 반성자료 몇 줄 써서 대충 내고 그냥 부장들이 알아서 하거나 교직원 회의에서 약 한 시간 동안 대충하는 정도였다. 반성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교장, 교감, 부장들은 그저 해 오던 대로 그냥 하기만 바랬다.

그런데 여기서는 갑자기 다들 눈빛이 비장해지면서 나름 생각해 왔던 것을 정리하더니 올해는 좀 압축해서 짧게 해 보자며 회의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평가회에서 나는 그야말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회의 시작 전에 회의 자체에 대해 합의하고 결정을 해야 했다. 의사결정은 만장일치로 할 것인지, 과반수 동의로 할 것인지, 발언의 시간과 순서는 어찌할 것인지, 모두가 돌아가면서 발언을 할 것인지 등을 먼저 약속하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 내용은 한 학기 동안 우리 학교에서 했었던 모든 행사와 교육활동에 대해 하나하나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었다. 각 행사나 활동마다 어떤 점이 좋았는지, 어떤 점이 새로웠는지, 부족한 점은 무엇이었는지, 건의할 점은 무엇인지, 내년에는 어떻게 할지를 하나하나 따지고 논의하고 수정하면서 회의록에 기록을 남겨 갔다.

하루가 부족하자 이틀을 했고, 그래도 부족하자 3일 동안 회의가 진행되었다. 치열하게 논쟁을 하기도 하고, 수고했다며 다독이기도 하면서 모두가 주인이자 주체로서 학교와 아이들을 위해 에너지를 쏟아 내고 있었다. 힘도 들고 피곤했지만 뭔가 마음속이 뻥 뚫리는 시원함과 상쾌함이 몰려왔다. 마무리 회식에서 술을 마셔도 좀처럼 취하지 않을 정도로 뭔가 들뜨고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나름 싸운다고 싸우면서도 나도 모르게 타성에 젖어 해 오던 대로, 시키는 대로 살아왔는데 알아서, 스스로 주인으로서,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새로운 삶은 서서히 나를 바꾸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교사로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일까? 아이들과 무얼 할까? 어떻게 해 볼까? 어디를 가 볼까? 어떤 것이 아이들을 위해 더 좋을까? 교과서 내용 대신에 무엇이 더 좋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평가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번 행사는 이런 점에서는 참 좋네, 이렇게 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점은 반성회 때 얘기해 보면 좋겠다, 내년에 이건 좀 바꾸자 등등 뭔가 오래전에 잊고 지냈던 것들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단순히 내가 떠안아서 가르치고 책임져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결정하는 소중한 친구들이 되어 갔고 나도 더욱 그들을 존중하고 주인으로서 인정해 가기 시작했다. 동료 교사들에게 던지는 질문의 수준도 달라져 갔다. 다른 교사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더욱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각자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고민하는지, 무엇을 준비했는지, 무엇이 힘들게 하는지 묻고 배우기 시작했고 술자리에서도 누구의 뒷담화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랑비에 옷이 젖어 갔다.

이렇게 나를 적신 가랑비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교사 평가도, 돈 몇 푼 쥐어 주는 성과급도, 달콤한 승진의 유혹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교육의 주체이자 주인으로서 존중해 주는 것, 우뚝 설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에너지로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니가 뭔데 그러냐는 비난이 아니라 선생님이 필요하면 그렇게 하라는 믿음은 곧 책임감으로 이어졌고 책임감은 다시 더 깊은 고민과 성찰과 연구와 준비로 이어졌다. 자신들을 위해 고민하며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교사들을 아이들은 진심으로 대하고 있었고 다시 이 아이들을 위해 교사는 더욱 에너지를 쏟고 집중하고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모든 것의 핵심은 교사를 교육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었다. 이것은 많은 예산이 드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시설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환경이 갖춰져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골이든 도시든, 잘사는 동네든 못사는 동네든, 서울이든 지방이든 상관없이 생각과 의지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네 교사들은 그저 정권에서 가르치라는 대로만 가르쳐야 했다. 교과서에 없는 것은 물론 심지어 명백한 진실조차도 가르쳐서는 안 되었다. 아이들을 민주시민으로서 가르치고 이끌고 삶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정권의 녹음기로서 정권에 무조건 충성하는 충견과도 같은 역할만 해야 했다. 민주국가의 정당한 시민이건만 정치적 중립은 고사하고 정치에 참여조차 할 수 없는 것이나 역사교과서 국정화, 전교조의 탄압 등은 오늘날도 교사를 정권의 나팔수, 정권의 녹음기 정도로 여기고 마음껏 휘두르고자 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현행 교사용 지도서만 봐도 정권이 교사의 녹음기화를 얼마나 갈망하는지 알 수 있다. 해마다 교사용 지도서는 점점 커지고 화려해지고 무거워지고 있다. 핵심적인 학습 내용에 대해 뼈대를 제시하고 보조 자료로서 교사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거나 교사가 자율적으로 수업을 조직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 내용을 작게 축소해서 그대로 보여 주면서 수업의 흐름, 교사의 질문과 아이들의 답변이 마치 연극 대본처럼 쓰여 있다. 교대를 나오지 않은 사람도 이 내용을 달달 외우는 것만으로 충분히 수업이 가능할 정도다. 그저 수업을 진행하는 한 예를 써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변명하지만 왜 굳이 수업의 예를 그렇게 대본처럼 써 놓아야 했을까? 이렇게 수업할 바에야 차라리 교육방송을 보여 주는 게 백번 낫지 않을까?

비단 교육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는 전체적으로 성과만을 중시할 뿐 그것을 위해 일하는 인간에 대한 인정과 존중, 배려가 거의 전무한 상태다. 그러면서 개혁을 한다는 둥, 혁신을 해야 한다는 둥 위에서부터 외쳐 대니 힘없는 사람들은 맨날 서러울 뿐이다. 생각해 보라. 서러운 존재들이 뭘 얼마나 해 낼 수 있겠는가? 어느 집단이든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단호히 처벌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전에 그 일을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교육개혁도, 교육혁신도 마찬가지다. 돈부터 퍼붓고, 시설부터 고치고, 자료집이나 내고, 단기적 성과를 강조하고, 점수나 돈으로 유혹하지 말고 우선 교사들이 교육의 가장 중요한 주체임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자율성을 줘 교육의 주체로서 활동하게 보장하고, 그들의 교육활동에 대해 사회적 차원에서 배려를 하도록 하는 것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변화에 대한 욕구를 느끼게 하고 변화를 이끌게 하고 변화를 통한 희열을 맛보도록 해야 한다. 그때도 욕먹을 짓을 하는 놈들이 있다면 그때 그놈들에게 속 시원하게 욕해 주자. 다른 분들 얼굴에 먹칠하지 말라고 말이다. 이것이 보다 성숙하고 발전과 혁신의 에너지가 보장되는 사회가 아닐까?

이제 다음 달이면 또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어떤 아이들을 만나게 될까? 그 녀석들과는 무엇을 어떻게 할까?

 
 
채성욱 교사(루도비코)
 2003년부터 인천과 경기도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