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월 31일(연중 제4주일) 루카4,21-30

대개 사람들은 ‘좋은 말’, ‘덕스런 말’, ‘축복의 말’은 별다른 이견 없이 좋아들 한다. 다만 그 말들이 자신의 삶과 맞닿아 있지 않을 때, 자신의 계급과 어울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그 말에 무관심하거나 냉소적 태도로 돌변한다.

오늘 복음의 나자렛 사람들이 그러하다. 예수에 대해 좋게 말하며 놀라워하던 나자렛 사람들이 왜 예수에게 분노했을까. 예수가 선포한 이사야의 말씀은 가난한 이, 잡혀간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들을 향한다.(루카 4,18 참조) 그리고 예수는 그 말씀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까지 이야기한다.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루카 4,23 참조 )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를 향해 자신들에게도 ‘좋은 일’, ‘신기한 일’을 하도록 부추긴다. 마르코에 따르면 예수는 그 어떤 일도 나자렛 사람들을 위해 행하지 않았다고 한다.(마르 6,1-6)  나자렛 사람들에게 그 어떤 믿음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나자렛 사람들을 ‘믿음’의 잣대로 바라보지만,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를 ‘자기 민족’, ‘자기 고향’, ‘자기 사람’으로 여긴다. 예수의 관심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이라는 ‘계급적 관심’이었으나 나자렛 사람들은 혈연과 혈통이라는 ‘민족적 관심’에 젖어 있다.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루카가 전하는 예수는 나자렛 사람들의 ‘선민 의식’에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낸다. 지난 역사 속에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적이 이스라엘인이 아닌 이방인에게 주어졌음을 말하면서,(루카 4,25-27)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앙을 문제 삼은 것이다. 사실, 루카는 구원의 자리에서 ‘선민적 특혜’를 제거한다.(사도 7장 참조) 이방인이라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이는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 누린다는 것이다. 예수의 인기를 소문을 통해 전해 듣고, 자신들에게 좋은 일을 해 주리라 기대했던 나자렛 사람들,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자부심에 상처를 받았고, 이 때문에 화가 잔뜩 난 것이다.

민족주의나 선민의식이나 인민들의 삶의 자리에선 사회적 기득권을 옹호하는 데 소용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같은 민족이라도 다 같은 사회적 여건에 놓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이건희 회장과 대다수 인민의 삶은 다르며, 금수저와 흙수저의 삶 또한 결코 맞닿아 있지 않다. 축구공 하나에 모두가 하나된 것처럼 외쳐대는 민족주의는 뼈 빠지게 일해도 최저임금을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자들에게 무작정 주입되는 마약과 같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를 좋게 말하다가 나중에는 예수를 떨어뜨려 죽이려 한 것은, 그들에게 있어 가난한 이, 갇힌 이 등을 고려하는 계급적 구별점이 없기 때문이며, 그것으로 그들은 계급을 이야기하는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새해가 돌아올 때마다 들리는 말들이 ‘부자 되세요’ 아니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들이다. 저마다 부자되려고 덤비면 가난한 자들은 상대적으로 더욱 가난에 몸부림칠 테고, 모두가 복 받길 바라면 슬픔과 고통에 아파하는 이들에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이 어떤 계급을 차지하고 있는지, 그 계급은 또 어떤 계급과 조우하거나 대립하고 있는지 따져 보는 것이 ‘부자되는 것’ 보다, ‘복 받는 것’ 보다 더욱 중요하다. 부자되기보다, 복 받기보다, 나 혼자 부자인 게 부끄럽고, 나 혼자 복 받는 게 염치없다고 느끼는 세상이 예수가 바라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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