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장애인 차별 없는 교회를 위해]

▲ 명동성당 본출입구 앞에는 든든한 계단이 버티고 있다. 장애인은 성당 뒷편 사제관을 에돌아야 제단 쪽 입구로 출입할 수 있다.


예수께선 당신 교회의 교회됨의 증표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 것”(마태 11,5)이라고 단언하셨다. 다시 말해 ‘시각장애인이 보게 되고 지체장애인이 걷게 되며 나환우가 깨끗해지고 청각장애인이 듣게 되는’ 그런 치유 행위야말로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라는 말씀이다.

교회의 천정을 찢어서라도

그런데 이 시대 장애인들이 그런 치유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치유의 한마당이 교회 안에 마련이나 되어 있는 것일까? 오히려 교회마저 하나의 장벽임을 실감하곤 좌절할 정도는 아닌가. 비장애인(일반인) 위주로 되어 있는 교회의 조직체계,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눈앞에 와 닿는 제반 시설물의 비복지적 구조는 장애인을 근본적으로 소외시키고 있다.

사실 비장애인에겐 아무렇지도 않는 계단 하나, 문턱 하나가 만리장성보다 더 높고 두텁게 느껴지는 게 장애인의 현실이다. 교회가 지닌 이러한 벽은 그것이 장애인 개개인은 물론이고 교회공동체 전체의 구원의 차원에까지 닿는 근본적인 문제인 까닭에 더욱 심각하다. 누구보다 신앙이 필요한 장애인들이 교회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교회에 접근조차 못한다면 얼마나 큰 모순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환자가 지붕을 뚫고 내려올 만큼(마르 2,4) 낮고도 낮았다. 그럴진대 불야성 같은 첨탑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이 시대 어느 교회가 자신의 천정을 찢으면서까지 사회의 아픔을 온전히 받아들일 것인가. 교회는 높게만 쌓아 올라가는 바벨탑을 허물고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는’(탈출 16,18) 나눔의 공동체의식을 지녀야 한다.

사실 끊임없이 나누어 낮아져 높낮이가 전혀 없게 된 그 땅(이사 40,4), 평지 그곳이야말로 바로 하느님 나라가 아닐까. 지상의 선취된 하느님 나라인 교회도 마땅히 자신을 장애인을 비롯한 소외된 이들의 쉼터로 내어놓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소수의 그들’만이 아닌 궁극적으로 교회공동체 전체를 위함이다.

소외된 이가 있는 한 우리의 행복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독점과 나뉨의 ‘벽(壁)의 구조’를, 나눔의 공동체의식의 ‘장(場)의 구조’로 전환시키고서 모든 이를 얼싸안을 수 있는 사랑의 넉넉한 가슴을 교회가 지닐 때, 그 사랑은 교회를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성장시키고 성숙시킬 것이다. 교회가 가난해져야 함은,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더 옳고 참되고 성스러워지기 위함이 아니라, 그래야만 비로소 옳고 참되고 성스러움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 약자를 배려하는 교회, 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신해 주는 교회, 교회 전반에 공동선을 추구하는 의식이 자연스레 뿌리내릴 때, 교회는 자기 신원을 되찾게 되면서 그 생명력으로 인해 말 그대로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

장애,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 왼쪽에 안경 쓴 이가 정중규씨. 그는 나사렛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현재 대구대학교에서 장애인문제를 좀더 깊숙이 다루기 위해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이 사회에서의 장애인이 겪는 아픔은 도무지 그 어디에도 발붙일 데가 없는 데서 비롯되는 ‘뿌리 뽑히는 아픔’이다. 그건 요즘 사회에서 유행하는 명퇴나 조퇴 같은 실업자가 겪는 아픔 이상이다. 장애인들은 이제껏 사회시스템에서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조차 철저히 배제되어 왔다. 그럴진대 장애인들이 사회적응에 별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참으로 ‘이상’한 것은 장애인이 아니라, 오히려 숱한 환경적 ‘장애’를 지니고 있어 장애인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이 사회가 ‘이상’한 것이고, 그런 사회가 한 인간을 장애인으로 ‘낙인’ 찍었던 것이다. 사실 산업화의 병폐로 ‘인간환경’이 극도로 악화되어 교통사고나 성인병 등이 다반사인 이 사회에선 누구나 예비장애인이며, 실제로 후천적 장애가 80%를 상회하는 현실은 더 이상 장애인문제가 ‘소수의 그들’만의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장애란 불완전한 인간존재의 분명한 표상이다. 우리 교회가 ‘장애인’, 아니 ‘장애’ 앞에 보다 겸손해져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것은 어쭙잖은 동정을 말함이 아니다. 흔히 교회에선 장애인들을 비롯한 병자들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세상의 죄를 대신해 고통을 겪는다.’는 식의 대속사상으로 풀어 그들을 아자젤의 염소 꼴(레위 16,21) 같이 애꿎은 희생양으로 만든다. 그건 참으로 편한 논리 전개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들이 겪는 고통의 무게에 비해 너무 가볍고도 천박한 이해가 될 수도 있다.

누가 장애인의 아픔을 다 알 것인가. 오직 ‘장애’를 가졌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다운 삶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하는 이 서글픈 현실의 무게는 어쩌면 장애인 자신조차 알 수 없이 무거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실존에 대한 정직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겸허함과 깊이 있는 통찰이 필요하다.

장애인은 모자라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

교회는 장애에 대한 영성 및 신학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시대의 징표’를 복음의 빛으로 밝혀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교회는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새롭게 대두된 장애인문제 역시 끌어안고 그 해결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사목은 단순히 특수사목의 한 부분으로만 그치지 않고, 교회의 신원과 정체성 그 핵심에 닿는 문제로서 교회의 공동체성을 가름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거기에다 장애란 분명 하나의 개성이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 장애도 하나의 ‘다름’으로 파악해야 한다.

무엇보다 모든 장애인이 재활이나 치료를 통해 이른바 정상인이 될 수 없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획일화된 잣대로 장애를 ‘모자람’으로 쉬 판단하는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 그 자체를 ‘다름’의 고유한 삶으로 받아들여 주는 깨어 있는 인식이 교회에 요구된다. 어쩌면 그 ‘다름’이야말로 삼라만상을 낳은 하느님 창조사업의 신비가 아닌가. 특히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보화시대를 맞아 ‘일치의 성사’인 교회는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기 위한 선교전략 차원에서라도 ‘다름’에 대해 좀 더 너그러워져야 한다. 장애인을 무언가 베풀어주어야 할 ‘대상’이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 더불어 함께 살아갈 ‘이웃’으로 여기는 인식의 개선이 교회 내에서부터 이루어지길 진정 기원한다.

언젠가 장애인 모두가 교회 안에서 사슴처럼 마음껏 뛰어 놀며 닫혔던 귀가 열리고 굳었던 혀가 풀려 신명나게 노래할(이사 35,5-6) 그날, 교회의 따스한 손길 안에서 모든 눈물이 씻겨져 장애인 모두가 온전하게 다시 태어날 치유의 그날, 무엇보다 우리의 삶과 함께 하며 아픔과 슬픔의 까닭이었던 장애의 가시나무가 파스카의 신비를 통해 구원을 가져다 줄 향기로운 생명의 십자가 나무로 변형되어 나타날 새 하늘 새 땅의 그날, 교회의 공동체성 곧 전체성은 온전히 회복될 것이다. 이렇게 2천년 전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방과 자유의 전갈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드러내신 희년의 선포(루카 4,18)로 시작된 교회의 여정은 비로소 그 완성의 대단원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정중규 / 장애인운동가, 지체장애 1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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