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해방신학하기의 기초적 구조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해방신학은 이론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하고 명백한 현실의 상황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해방신학하기는 무엇보다 상황을 바라보고(파악, ver), 바라본 상황에 대하여 판단하고(성찰, juzgar), 그리고 그 상황 안에서 상황의 변화를 위하여 행동하는(실천, actuar) 것으로 이루어진다. 해방신학의 방법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현장과의 연계다. 현장을 떠나지 않는 신학이야말로 올바른 신학이다.

올바른 신학의 내용은 올바른 신학하기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해방신학은 서구신학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서구신학이 다양한 신학방법론에도 불변하는 신학내용의 존재를 주장한다면 해방신학은 어떤 방법론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신학내용이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이는 신학은 자체의 내용으로부터 늘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황과 연계된 그리고 상황으로부터 출발하는 방법론으로 인하여 신학의 내용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어디서 위기가 오는 것일까? 사람들은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한국교회가 살아날 방법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가운데 주목할 것은 위기에 대한 진단이다. 어느 누구도 잘못된 신학에 대해서는 감히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혹시 신학 내용의 문제로부터 위기가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회복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문제는 어떻게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치열하게 고민하고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방안이 있겠지만 나는 우선 신학의 해방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많은 목회자와 사목자와 그리고 교회의 잘못된 행위 뒤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불변의 진리라고 믿어 왔던 신학이 (생각과 사상은 우리의 행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잘못되어 있어서 그런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소위 정통이라고 믿어 왔던 교리와 신학을 뒤집어 보는 작업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올바른 신학방법, 상황으로부터 상황으로 그리고 상황 안에서 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해방신학적 방법론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믿는다. 해방신학적 방법론이 우리로 하여금 신학을 해방시킴으로써, 처음부터 신학을 다시 하게 함으로써 삶과 연관된 신학내용을 갖게 하지 않을까. 오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신학 다시 하기"가 아닐까.

스페인 신학자 호세 마리아 마르도네스(Jose Maria Mardones)는 몇 년 전 "우리 안의 하느님 죽이기"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뒤집어 놓는 시도를 했다. 신학을 다시 해야 한다. 성서를 다시 읽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해방신학이 주장하고 있는 가난한 자의 시각으로 성서를 다시 읽고 신학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삶의 현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신학방법으로 인하여 우리는 신학을 다시 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사목 현장은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해방신학을 좌파 신학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열매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해방신학에 투신한 사람들 중 누가 그리스도교인의 사명을 잊고 부유하게 살던가?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던가? 그렇지 않다. 민중과 함께 호흡하고 고생하는 그들의 삶이 곧 해방신학의 정당성이다. 내가 자주 듣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목사님은 사람은 참 좋은데 어쩌다가 해방신학을 공부하게 되셨어요?”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신학의 좌우를 따지기 전에 진정성의 문제를 먼저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현장 안으로 들어가기

이제 현장(상황)에 대하여 보다 자세하게 말해 보기로 하자. 여기서 현장은 가난의 현장이다. 가난의 현장을 우리는 어떻게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해방신학은 세 가지 종류의 도구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사회분석적 도구 이며 둘째 성서해석학적 도구,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실천적 도구다. 이러한 세 가지 도구를 통하여 신학적 성찰이 이루어진다.

해방신학은 이 세 가지 도구의 역동적 연계 속에서 가난의 현실을 이해하고자 한다. 사회분석적 도구를 통하여 가난한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의 세계를 사회적인 측면에서 왜 사람들이 가난한가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리고 성서해석학적 측면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은 무엇인가를 파악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실천적 도구를 통해 행위의 측면에서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서 가난과 억압의 현실을 타개하고 극복하는 구체적 행위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고자 한다. 조금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이 부분은 “해방신학하기”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핵심적이기에 좀 자세하게 이야기하려고 한다.

먼저 사회분석적 방법이다. 가난한 현실은 단순하게 개인적 문제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사회구조적 모습이다. 우리는 언제나 게으르면 가난하게 살게 된다는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라틴아메리카에 살면서 한인들에게 항상 듣는 이야기가 이곳 사람들은 일하기 싫어하고 놀기 좋아하는 게으른 사람들이기 때문에 좋은 자연환경에도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가난의 문제를 개인의 게으름 혹은 무능력으로 돌릴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수십 년을 살아가면서 체험한다.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 게으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는지 모른다. 새벽 일찍부터 한 시간을 걸어서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일터로 간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이들은 귀가한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에 다시 일터로 향하고.... 과연 이들에게 게으르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가난에 대해 말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현실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왜 사람들은 가난한가? 그리고 가난한 현실은 왜 계속되는가? 최근 한국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가난의 세습, 헬조선 그리고 수저론 등의 배후에는 이러한 가난한 현실에 대한 사회학적 질문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 "푸에블라 문헌", 성찬성 옮김, 분도출판사, 1991
우리는 어떻게 가난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보이는 가난의 현실은 다양하다. 그것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푸에블라 문헌은 가난의 다양한 형태를 어린이, 청년, 토착민, 농부,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실업자, 여인들,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노인들의 얼굴에서 발견하고 있다.(32-39항) 무엇보다도 가난은 사회적으로 세습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렇게 우리는 가난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는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발견한다.

가난의 이해는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먼저 가난을 개인 능력의 문제로 이해하는 경험적 설명, 다음으로 가난을 선진과 후진이라는 발전의 단계적 문제로 이해하는 기능적 설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난을 억압으로 설명하는 변증법적 이해가 있다. 가난이 경험적인 측면에서 개인의 무능력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것에 대한 해결은 자선, 지원, 후원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두 번째 그것을 기능적으로 이해한다면 가난의 해결은 선진국들의 성장 모델을 모방함으로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발전모델은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하고 부자는 더욱 더 부자가 되어 가는 극심한 빈부의 차이를 만들어서 결국 후진국의 가난을 더욱 구조적으로 심화시켜 나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변증적인 이해에서 가난은 개인을 넘어서서 사회구조적 문제로 설명된다. 여기서 가난의 해결은 혁명적 방법 다시 말하면 사회의 기본적 구조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가난의 해결은 새로운 대안적 사회 건설을 통해 이루어진다. 비로소 이 단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경멸 혹은 자선’의 “대상”에서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다.

바로 여기서, 즉 가난에 대한 변증법적 이해에서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와 만남을 경험한다. 그리고 해방신학은 공산주의 신학이라는 비판(나는 이 비판을 해방신학과 ‘마르크스주의’의 만남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이에 대하여 해방신학자들이 적극 설명하지 못 하는 데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본 지면에서 이에 대한 설명을 더 해 보려고 한다)과 비난을 동시에 직면하게 된다. 과연 해방신학은 공산주의 신학인가라는 질문에는 이미 여러 차례 본 지면을 통하여 답변해 왔기에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이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해 보기로 하자.

사실상 해방신학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한 번도 그 자체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마르크스주의는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서 발생하는 질문에 답변하기 위하여 활용됐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를 순전히 도구적인 측면에서 활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를 절대적 가치를 가진 이데올로기로 결코 간주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을 신학에 적용하는 데 강제적 혹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의 적용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하면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가 제시하고 있는 몇 가지 사회학적 방법론을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편에서, 가난과 억압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임의대로, 그리고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는 내용은 1. 사회 분석에서 경제적 요소가 갖고 있는 중요성 2. 사회이해에서의 계급투쟁론 3. 종교를 포함한 이데올로기의 신비적 권력 이론 등이다. 마르크스주의를 그 자체로 사용하지 않는 관계로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는 다른 어떤 이론과 마찬가지로 해방의 길에서 해방신학에게 중요한 동지가 될 수 있으나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유일하고 절대적인 안내자는 결코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푸에블라 문헌 554항)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일한 안내자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기 때문이다.(마태 23,10) 그러므로 해방 신학자에게 유물론과 마르크스주의적 무신론은 유혹이 될 수 없다.(레오나르두 보프)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를 활용한 가난과 억압의 현실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은 해방신학으로부터 우리의 현실에서 구체적, 실질적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실천적 이해를 갖도록 해 준다.

추상적 언어에서 실질적 언어로

오늘 교회는 신앙의 언어를 추상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과연 신앙의 언어들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떤 적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마커스 보그(Marcus Borg)가 그의 저서 “Speaking Christian”(“그리스도교 신앙을 말하다”, 비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의 신앙 언어는 오늘의 삶의 언어와는 상관없는 죽은 언어가 되고 말았다. 해방신학은 사회학적 분석의 도구를 통해 우리 신앙의 언어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언어로 만든다. 해방과 구원은 사후에 발생하는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것이라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 사건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준다. 구원을 맛보게 만든다. 그러기에 가난한 사람의 해방에 헌신하는 것은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다. 결국 가난한 사람이 우리를 구원한다.

다음의 글에서는 가난 이해에 있어서 성서해석학적 도구 그리고 실천적 도구에 대하여 말할 것이다. 이러한 도구들을 통하여 우리는 해방신학이 주장하는 구원과 해방이 무엇인가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러한 것이 오늘 위기의 한국 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홍인식 목사
파라과이 국립아순시온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신학대학 교수 역임.
현재 멕시코 장로교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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