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인권]

▲ 어느 장애인야학에서 장애인 교사와 학생들이 모여서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사진/고동주) 

4월 20일. “곡우”와 “장애인의 날”이다. 지식이 짧아 ‘곡우’가 뭐하는 날인가 하고 찾아봤더니 나무가 한창 물이 오르는 시기이고, 곡우 무렵이면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가 내리고 그 물로 못자리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나 마른다”고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날이었다니. 기상청에 따르면 4월 20일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고 하니 정말 신기할 뿐이다, 하면서도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건 “4.20 장애인 차별철폐의 날” 집회가 있기 때문.

4월 20일, “장애인의 날”. 장애인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깊게 하여 지위를 향상하고, 장애인의 재활의욕을 높이기 위해 제정한 기념일이라고 한다. 뭐, 뜻은 좋다고 치자. 그러나 현실에서 ‘장애인의 날’은 과연 장애인들에게 어떤 날일까? 이 땅의 약 450만 명의 장애인들에게 1년에 한 번 있는 ‘장애인의 날’은 그저 ‘선택 받은’ 혹은 ‘운 좋은’ 몇몇의 장애인들이 외출하는 날이 아닐까.

커다란 행사장에 장애를 극복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사람에게 상을 주고, 대통령을 비롯한 온갖 정계인사들은 장애인시설을 방문하여 밥을 먹여주는, 그리고 그 시설의 장애인들은 손님을 맞이할 노래와 춤 등을 선사하며 마지막 단체사진으로 장식하는 날, 그리고 많은 선물들과 복지 시설에 대한 지원이 아주 많이 들어오는 날, 이것이 현실에서의 장애인의 날의 모습이다.

450만 명의 장애인들은 일생을 살아가며 1년에 한 번 세상으로부터 존중받는 듯한 삶을 산다. 그것이 장애인의 날이다. 나머지 364일의 삶은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 가려진다. 1년에 집 밖으로 혹은 시설 밖으로 외출을 하는 장애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직도 권리보다는 동정과 시혜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그 눈길이 어떤지 세상은 관심이 없는 건 아닐까. 그저 우리의 ‘착한 마음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장애인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장애인의 날’이 오히려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 시켜주거나, 동정과 시혜의 시선을 강화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의 날’은 더더욱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이 되어야 한다.

365일 중 단 하루만이 장애인들이 살 수 있는 날이 아니라, 365일 비장애인이 삶을 사는 것과 다름없이 살 수 있는 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직도 장애인이 외출을 하면 혀끝을 차며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왜 나왔어. 편히 집 안에 있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쉬운 것이 ‘역지사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상대방이 되어 보는 것, 상상력을 통해 내가 상대방이 되어 그 삶이 어떨지 떠올려 보는 것이다.

내가 방 안에 평생 박혀 살아야 한다면? 나는 살고 싶은데 내 부모는 같이 죽자고 한다면? 나는 불편한 게 없는데 얼굴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꾸 과도한 친절을 베풀려고 한다면?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를 시설에 입소시킨다면? 이 모든 질문들에 상상력을 더해 답을 떠올려보면 좋겠다.

나무가 한창 물 오르는 시기라는 ‘곡우’. 그래서 고로쇠나무를 비롯한 나무의 수액을 받아먹으면 위장병이 낫는다고 하여 즐겨 마셨다는 ‘곡우’. ‘인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가뭄을 해결하는 단비가 내리듯, 척박한 인권의 현실에 단비 같은 무언가가 내렸으면 하는 바람도 갖곤 한다. 하지만 인권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가뭄에 단비가 내리더라도 집회는 계속 되어야겠고, 그 비를 원망하진 말아야겠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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