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월 24일(연중 제3주일) 루카 1,1-4; 4,14-21

루카 복음의 시작은 헬레니즘 문화 속에 등장하는 역사가들의 문체와 많이 닮아 있다. 루카 복음 저자를 역사가로 여기든 아니든, 그가 ‘테오필로(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라는 사람에게 예수의 일생에 대해 ‘자세히, 순서대로’ 써 내려간 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루카 복음이다.

나는 루카라는 한 인물에 대해 집중해서, 그의 필력에 너무 치중하는 것에 상당한 부담이 있다. 까닭인즉, 루카 역시 '말씀의 종들'('우리'로 표현된다)에게 전해 들은 것을 바탕으로 테오필로에게 글을 남기는 것이며, 또한 그 글은 테오필로가 그 전부터 들어 온 것에 대한 보충적 확증이기 때문이다. 소위 ‘우리’라는 연대 안에서 루카는 자신의 글을 테오필로에게 전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삶에 대해 이미 고찰하고 되새김질한 이들일 테다. 공관 복음서의 원조격인 마르코 복음 저자일 수도 있겠고 루카 복음 저자가 사적으로 모아들인 자료들의 저자일 수도 있을테다. 다만 이 '우리'들이 지향하고 집중하는 것은 예수의 삶인 것이고, 그 삶에 대한 이런 저런 관점과 재해석을 '우리'는 다양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라는 무리는 예수에 대해 무엇이든 전해 주고자 했던 사람들이었고 그 원의가 글로 남아 지금 '우리'에게 까지 전해진 것이다. 루카 복음 저자는 시대와 장소를 넘어선 '우리'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2016년 지금 '우리'와 조우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에 대한 정체성에 있다. 도대체 '우리'를 어떻게 규정하는가가 중요하다. 2002년 월드컵, 그때의 '우리'는 유럽인들에게 파시즘적 광기로 느껴졌다는 사실은 나 자신이 프랑스에서 월드컵을 시청할 때 해설자의 한마디로 요약된다. "아~ 저렇게 모두가 빨갛게 입고 있는 모습이 북한과 다를 바 없군요.".... 그때, '대~한민국'에서 빨갛게 꾸미지 않으면 간첩과도 같은 대우를 받는 건 당연했었다. 우린 북한이 어떤 상황인지 객관적 정보 없이도 북한을 미개한 족속이라 업신여긴다. 우린 일본의 일반 서민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사고를 공유하고 있는지 살펴보지도 않은 채 일본을 ‘쪽발이’라며 멸시하는 천박함에 젖어 있다. 이러한 '우리'는 동물의 무리와 다를 바 없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은 '우리'는 위험하다. 바벨탑의 '우리'와 같은 것이고 하느님은 그 '우리'를 완전히 해체하셨다. 루카 복음 저자의 두 번째 작품인 사도행전에서 사도가 하나의 언어로 말을 하는데 사람들은 각자 고향의 언어로 알아듣는 장면이 있다.(사도 2,4-12 참조) 하나이되 각자의 색깔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하느님이 원하는 참된 '우리'의 정체성이다.

▲ 2015년 9월 14일 경북 영덕성당에서 열린 '영덕 신규 핵발전소 백지화를 촉구하는 생명평화 미사'를 위해 입당하는 사제들. ⓒ강한 기자

루카 복음에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우리'에 대한 정체성을 명확히 규정해 주는 대목이 루카 복음 4,16-21이다. 회당에서 예수는 예언서의 한 대목을 힘주어 소개한다. 가난한 이, 잡혀간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를 구체적으로 일컫는 이사야의 한 대목, 이 말씀 안에는 함께하지 못한 이들의 눈물이, 아픔이 고스란히 놓여 있다. '우리'가 함께 해 주지 않아 아파하는 이들을 주님의 영(루카 4,18)과 더불어 예수는 함께 하시고자 했다. 그리고 예수는 지체 없이 회당에 앉아 있던 '모든 이'들을 향해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바로 이 자리에서 완성되었음을 선포한다.(루카 4,21) 회당에서 예수를 바라보던 이들의 눈빛에는 존중과 믿음이 녹아 있다.(루카 4,20의 '주시하였다'는 그리스어 동사(아테니조)에서 존경과 신의를 가지고 한 사람을 쳐다보는 동작을 일컫는다.) 서로에 대한 강한 신뢰는 '우리'라는 공동체의 기본 덕목이다. 루카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써 나가면서 생각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가 나눔과 격려로 드러나는 친교의 공동체였다.(사도 2,42-47) 이 친교는 단순히 '유유상종'의 즐거움으로 끝날 것이 아니었다. '우리' 중에 소외받고 힘들어 하는 이들을 껴안을 수 있는 지난하고도 연민 가득한 개방성을 전제로 하는 친교였다.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고 늘 듣고 사는 요즘이다. 경제 민주화니, 동반성장이니 모두가 더불어 살자는 것이고, 정당의 이름마저 '더불어'를 차용하는 시대다. 동시에 더불어 함께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너무나 폭력적인 말과 행동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던지는 요즘이기도 하다. 물질적 수준의 차이로,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등을 돌리는 오늘 우리의 사회, 예수가 들려주는 이사야의 한 대목으로 '우리'가 뭔지 다시 한번 고민해 봐야 할 시대다.

혹자는 그러더라. 요즘 시대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선동적인 방법으로 대들고 저항할 대상이 없다고, 예전 군부독재 시절과 다르다고.... 허나, 아직까지 뒤틀린 세상에 한 목소리 내고자 칠십 노인이 목에다 쇠사슬을 얽어매고, 남이 어떻게 보든 제 자식 죽음 앞에 바락바락 소리지르며 짐승처럼 울부짖는 어머니가 존재하는 한, 우린 여전히 루카 복음 저자가 바라는 '우리'를 제대로 만들어 가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부활 이전에 육화에 있음은 당연하다. 육화하지 않은 모든 가르침은 그것이 아무리 선하고 정의로울지라도 '우리'의 자리에선 낯설고 의미 없다. 따뜻한 방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죄스럽고 죄스럽고 또 죄스럽다. 이 엄동설한에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우리'의 한 형제가 겪는 춥고 배고픈 그 삶이 아직 내 것이 되지 않은 이 사실 하나로.... 나는 왜 사는가, '우리'가 되는 데 비겁하게 물러서 있는 이 삶을 왜 사는가.... 날이 추운 게 아니라 내 마음이 참 춥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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