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 Santuario di Rivotorto

신고딕 양식의 리보토르토 성당은 1586년 교황 시스토 5세의 요청으로 세워졌다. '리보토르토' 라는 명칭은 성지 근처에 ‘굽이굽이 흐르는 시냇물'에서 유래한다. 1455년 프란치스코 사카르도 수사는 초기 프란치스코 성인과 동료 수사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썩어가고 있었던 오래된 오두막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경당을 수리하고 확장하였다. 

 

프란치스코회 수도회의 첫 그룹이 리보토르토에서 빈곤한 상태에서 노동과 기도를 하기 위해 2년 (1209년-1211년) 동안 뜨문뜨문 이곳에 머물렀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곳에서 ‘수도생활의 방식’을 작성하여 동료 수사들과 함께 이를 실천하였고, 후에 교황 이노첸쪼 3세에게 이 회칙을 승인을 받았다. 

이곳 성지에서 의미 있는 한 사건이 일어났다. 성인은 하느님께 기도하기 위해 오두막에서 밤을 지새웠다. 자정쯤에 몇몇 수사들은 쉬고 다른 수사들은 기도하고 있었는데 현란하게 빛나는 불 수레가 오두막으로 들어오고 세 번이나 그 주위를 맴돌았다. 수레 위에는 한밤의 어둠을 밝히는 태양 모양의 빛나는 원이 위치하고 있었다. 기도하던 수사들은 이 광경에 얼이 빠졌고, 자고 있던 수사들은 깨어나 부들부들 떨었다. 강한 빛의 위력으로 인해 모든 이가 몰아지경에 빠졌다. 그 순간 수사들은 주님께서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인 자신들을 이끌기 위해 천상의 광채와 불꽃인 초월적인 형상으로 당신을 드러내신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프란치스코 성인은 새 엘리아처럼 영적인 사람들의 수레가 되도록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불 수레와 말들로 가득 찬 산을 볼 수 있도록 당신 종 엘리세오의 눈을 열어주셨던 그 때처럼 (2열왕 2,11)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느님의 기적을 볼 수 있도록 순수한 수사들의 마음을 열어주셨던 것이다.
 

이곳 성지에서 일어난 또 다른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이 오두막은 겨우 한 사람이 앉고 누울 수 있는 보잘 것 없는 장소였다. 수사들은 자주 빵이 부족하여 여기저기에서 동냥한 무청으로 연명하였다. 하느님의 사람인 프란치스코 성인은 쉬거나 기도하기를 원하는 수사 누구나 소음을 내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알아볼 수 있도록 작고 협소한 피난처인 오두막 대들보 위에 형제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하루는 수사들이 그곳에 있었는데 농부 한 사람이 노새와 함께 이곳에 도착하여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농부는 막부가내로 오두막 안으로 얼굴을 들이대며 노새에게 말했다. “들어가. 이곳은 우리가 머물기에 제격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말을 듣고 그 농부가 무뢰한 사람임을 직감했다. 무엇보다도 그 순간 깊은 침묵과 기도 중에 있는 수사들을 방해한 그 농부에게 적대감을 느꼈다.
 

 

 

 

리보트르토 대성당 야경

리보트로토 성당 내 오두막-프란치스코 성인과 동료 수사들이 휴식을 취한 곳


하지만 프란치스코 성인은 농부와 논쟁을 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고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에 헌신하도록 우리를 이곳에 부르신 것'이라고 말하고는 이 오두막을 가난한 한셈병 환자들에게 주고 포르치운콜라의 성 마리아 성당 옆에 있는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겼다.
 


<에피소드>

프란치스코 성인이 한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기꺼이 껴안을 수 있었던 것은 인간적인 힘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내가 로마 희망의 성 마리아 본당에서 만났던 한 가족의 헌신적인 사랑은 신앙의 힘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로사와 바오로 부부에게는 아들 귀도와 마우리초, 그리고 딸 줄리아가 있습니다. 큰 아들 귀도는 태어날 때 의사의 실수로 지체 장애와 정신박약의 증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 번의 유산 후에 힘들게 얻었던 귀도가 평생 장애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두 부부는 망연자실했을 것입니다.

아침 미사에 만나는 로사와 바오로 부부가 한국친구 집주인인 것을 나중에 알게 되어 우리와 참으로 인연이 깊다고 생각했습니다. 항상 미소가 가득한 로사 아줌마에게 숨은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둘째 마우리초와 막내 줄리아는 부모의 어려움을 기꺼이 나눠지며 살고 있습니다. 귀도의 해맑은 모습을 보면 가족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 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사회복지기관에서 파견한 봉사자 2명이 번갈아 가며 귀도와 함께 놀아줍니다. 두 부부와 기타 반주를 하는 줄리아가 아침 미사에 오기 때문에 마우리초가 그 시간 귀도를 살피고 - 어머니와 여동생은 성무일도까지 마치고 오기 때문에 - 아버지가 먼저 집에 돌아오면 출근을 합니다. 또한 귀도가 식사를 할 때면 온 가족이 함께 합심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 식탁 위에 있는 그릇을 잡아채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로사 아줌마는 젊었을 때 맞벌이했는데 남편이 늘 직장일로 늦게 귀가하여 세 아이들을 돌보느라 힘겨웠다고 합니다. 정년퇴직 후에는 남편 바오로가 귀도를 더 많이 돌보고 있습니다. 두 부부가 점점 나이가 들면서 근력이 부족하여 귀도를 보살피는 것이 점점 힘겨워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가족의 눈물겨운 사랑을 알고는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하자 온가족이 선뜻 받아들였습니다. 가족 전체 사진, 독사진, 귀도를 안고 있는 아버지 사진을 여러 컷 찍었습니다. 가족사진 중에서 걸작은 아들 귀도를 가슴에 안고 있는 바오로 아저씨의 사진입니다. 신뢰가 가득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지극한 사랑과 고통이 동시에 스며든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고 있는 부자의 사진입니다. 그 순간 그 모습이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시신을 안고 있는 성 마리아의 모습과 오버랩이 되었습니다. 아들의 장애로 온 가족이 더욱더 뭉치고 신앙으로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여러 장의 사진은 작은 크기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부자의 사진은 크게 뽑아 액자에 넣어 선물했습니다. 사진을 보면 너무도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을 대하니 참으로 흐뭇했습니다. ‘이런 것이 사진의 위력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났습니다. 바오로 아저씨는 그 액자를 거실 책장 앞에 놓인 다른 가족사진들과 함께 놓고는 참 기뻐했습니다.

우리 부부가 귀국한다고 하자 로사 바오로 가족은 바로 옆집인 자신들의 집에 세를 살고 있는 한국 가족과 우리 부부를 집으로 초대하여 직접 만든 여러 종류의 피자를 맛보게 했습니다. 우리가 로마를 떠나던 그 날 아침 미사 후에 로사 바오로 부부 외에 두 세 부부를 조촐한 아침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식사 후에 식탁에 둘러서서 서로의 손을 잡고 각자가 한 자유기도를 떠올리면 아직도 그 생생함이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베드로도 자신의 차례가 되자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우리가 만든 이탈리아어 식사 후 기도를 했습니다. 다들 이구동성으로 ‘베드로가 드디어 이탈리아어로 기도했어.’ 하며 기뻐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딸 줄리아와 메일을 주고받는 데, 우리 부부가 없고 내가 맡은 ‘알렐루야!’ 소프라노 부분이 없으니까 아침 미사가 썰렁하다고 합니다.
로사 & 바오로 부부 가족 사진

/최금자 글, 김용길 사진 2008.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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