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 뒤 처음

프란치스코 교황이 17일 로마에 있는 유대교 회당을 방문했다. 바티칸에서 티베르 강을 건너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그가 유대교 회당을 방문한 것은 즉위 뒤 처음이다.

방문 뒤, 유대교 회당의 리카르도 디 세니 수석 랍비는 <라베니르>에 “우리의 만남은 어느 한 종교에 속한다는 것이 적대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아주 시의적절하고 중요하며 긴급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라베니르>는 이탈리아 주교회의가 내는 신문이다.

가톨릭과 유대교의 관계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30년 전에 이 회당을 방문하고 유대인은 그리스도인의 “나이 많은 형제”(older brothers)라고 부르면서 2000년에 가까운 두 종교 사이의 벽을 무너뜨린 바 있다.

가톨릭과 유대교의 공식 대화는 가톨릭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우리 시대’(Nostra Aetate, 1965)를 발표하여, (그때까지 강한 통념이던) 유대인이 예수를 죽인 데 대해 집단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고 유대인과 가톨릭인의 종교적 유대를 강조한 뒤부터 시작되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유대교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인사하고 있다.(사진 출처 =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미국 브라운 대학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커처가 쓴 “유대인을 탄압한 교황들”(2001)에 따르면, 교황청은 “유대인을 굴종적 지위에 묶어 두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유대인의 부동산 소유를 금지하고 전문직을 갖지 못하게 했으며, 대학에 다니지 못하게 했고, 자유로이 여행하지 못하게 했다.” 유대인은 게토(집단거주지역)에만 살고 때로는 추방당하기도 했으며, 개종을 강요 당하기도 했다. 이번에 교황이 방문한 유대인 대회당은 1870년까지 교황들이 유대인을 몰아넣었던 그 비좁은 게토 자리 안에 있다.(편집자 주- 이탈리아 통일운동이 벌어지면서 그때까지 교황이 국가원수로서 지배하던 교황령과 로마가 1870년에 점령되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도 2010년에 이 회당을 방문했으나 당시 그가 비오 12세 교황의 시성을 추진 중이어서 유대교와 상당한 긴장이 있었다. 비오 12세는 제2차 대전 시기의 교황인데, 그가 당시 유대인 박해를 못 본 척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3월에 교황이 되기 전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로 있을 때부터 유대인과 가까운 관계였고, 2014년에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그리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관할하는) 서안을 방문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5월에는 자신은 비오 12세의 시성을 급히 추진할 생각이 없다고 밝힘으로써 비오 12세와 관련된 논란을 완화시켰다.

미국 유대인위원회의 종교간 대화 국제담당인 데이비드 로젠 랍비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번 방문은 거의 가족 재회에 가깝다. 새로 형성된 긍정적인 가톨릭-유대교 관계가 거의 규범이 되었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주 확실히 유대인의 진정한 친구로 보이며, 실제로 그는 그렇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그는 “유대 전통에서 세 번은 확인(hazakah)을 뜻하는데, 이제 세 번째로 교황이 방문했으니 앞으로 나오는 교황들도 이스라엘 방문은 물론 로마 유대교 회당을 방문하지 않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봤다.

기사 원문: http://www.haaretz.com/jewish/news/1.697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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