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월 17일(연중 제2주일) 요한 2, 1-11

무엇이 부족하다는 건, 채우려는 본능을 자극한다. 그러나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부족하다 느끼는 건, 대개 지나치게 많이 있어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간혹 옷장을 열어 볼 때, 자주 느낀다. 옷은 엄청 많은데, 무얼 입을까 하면서 일종의 결핍 의식에 사로잡힌다.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은 것에 집착해서 우리는 부족하다 외치는 건 아닐까 되돌아 본다.

카나 혼인잔치의 시작은 하나의 ‘결핍’에서부터다. 이 결핍은 단순한 모자람이나 부족으로 인한 상실감을 부추기는 말마디가 아니라, 다른 무엇을 채워 나갈 설렘 가득한 비움의 상태를 일컫는다는 말을 먼저 짚어 놓는다. 카나 혼인 잔치에 나타난 결핍의 요소들을 몇 가지 언급하면 이렇다. 먼저, 의미의 결핍이다. 카나 혼인 잔치 이야기는 제자들에게 하나의 기적이 아니라 ‘표징’이었다.(요한 2,11) 요한 복음의 저자는 소위 신기한 ‘기적’을 이야기하고픈 마음이 애당초 없었다. 특히나 예수의 낯선 초능력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공관복음에 흔한 ‘기적’이라는 말마디를 요한 복음은 사용하지 않는다. 표징은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의 의미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은 표징이요, 그 표징을 통해 제자들이 ‘믿는 이’로 거듭나는 게 표징이 담아내는 의미다.(요한 2,11) 표징에 집착하면 의미를 보지 못한다. 카나 혼인 잔치는 의미를 보게끔 표징적 사건 너머를 바라볼 줄 아는 여유를 찾게 한다.

또 다른 결핍으로 주목할 것은 물론 포도주의 결핍이다. 이스라엘의 혼인 잔치는 거의 일주일 혹은 이주일 동안 계속되며, 음식과 포도주를 풍족히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은 큰 실례가 된다.(토빗 8,19 참조) 예수는 포도주를 만드는 데 있어 주인공이 아니다. 우린 습관적으로 예수의 ‘첫번째’ 기적이라며 카나를 떠올린다. 그러나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결정적 행위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한걸음 물러서 있었다.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 포도주의 결핍을 두고 보이는 예수의 태도는 포도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만든다.

▲ '카나의 혼인잔치', 마르트 드 보.(1596)

세 번째로 관계의 결핍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가 마리아에 거리를 두는 듯한 모습은 우리 상식에 낯설다. 요한 복음은 이상하리만큼 마리아의 역할을 제한한다. 오늘 복음과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의 순간에만 마리아를 등장시킨다.(요한 19,25-27) 예수는 마리아를 향해 ‘여인’이라 부른다. 마리아의 ‘아들로서 예수’는 요한 복음의 관심사가 아니다.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이 세상에 왔고,(요한 5,19-20.30.36) 아버지의 뜻이라는 게 결국은 모든 인간들이 그분 안에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데 있었다.(요한 20,30) ‘여인’이라는 호칭은 초세기 교회에서 존칭에 가까운 것이었고, 믿는 이들 사이에 하느님의 어머니로 존경받았던 성모님을 가리킨 호칭이었다. ‘여인’은 예수가 자신의 어머니를 멀리하기 위한 호칭이라기보다는 ‘믿는 이’들과의 또 다른 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한 ‘비워 냄’의 호칭이 된다. 예수와 어머니의 관계에 ‘믿는 이’들을 불러오는 데 ‘여인’이라는 호칭은 소용된다. 예수는 굳이 마리아를 자신만의 어머니로 부르지 않는다.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 신앙의 모범으로 예수는 자신의 어머니를 공적으로 내어 놓고 자신의 사적인 어머니를 비워 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결핍은 ‘시간’의 결핍이다. 예수는 지금 자신의 ‘때’가 아니라 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가 지향하는 ‘때’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규정된다. 아버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때, 그 때는 역설적이게도 예수가 죽음의 위협 속에 놓여 있을 때다.(요한 17,1) 요한 복음에서 예수의 죽음은 세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고 세상 모든 이를 위해 마련된 생명의 표징적 사건이다.(요한 13,1;3,16 참조) 예수의 죽음을 향하여 요한 복음의 시간들은 모여들고, 요한 복음이 보여 주는 모든 표징적 사건은 예수의 죽음이 가리키는 그 시간을 준비한다. 죽음으로 생명을 얻는 그 시간을 위해, 아직 때가 아닌 카나의 시간은 세상 모든 이가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한다. 찰나의 순간에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옹졸함이 예수를 통해 아버지를 위한 전적인 희생과 세상 사람들을 위한 끝없는 사랑의 시간으로 초대된다.

카나 혼인 잔치 이야기는 누구하나 선뜻 나서서 이야기를 풀어 가는 분위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소외되거나 배제되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핍의 자리를 그대로 방치한 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고 그 결핍의 자리에 모든 등장인물이 덤벼들어 포도주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은 주인공이 아닌 조연의 자리에서 여유롭기 그지없다. 서로가 서로의 자리를 내어 주며, 서로를 생각하는 것으로 각자의 결핍을 채워 나간다.

이를테면, 마리아의 경우가 그렇다. 예수의 어머니가 추구한 것은 포도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리아는 포도주의 문제를 자신의 마음에서 비워 냈다. 포도주를 만들 궁리를 한 게 아니라 예수의 ‘말’을 있는 그대로 실천하게끔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는 데 마리아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요한 2,5) 일꾼들에게 무엇이든 당신 아들 예수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일렀다. 예수의 어떤 말이든 일꾼들을 통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예수의 어머니는 바라고 있었다. 예수가 내뱉은 말은 두 마디다. ‘물독에 물을 채워라’, 그리고 ‘그 물을 가져다 과방장에게 주어라.’ 일꾼들이 가득 채운 물독의 물은 과방장에게 인도되고, 과방장은 그 물을 ‘여전히’ 좋은 포도주로 평가한다. 잔치의 처음이든 끝이든 여전히 좋은 맛을 내는 포도주는 예수의 어떠한 말이라도 따르게 한 마리아의 비움과 일꾼들의 전적인 실천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풍성한 표징이다.(포도주는 새로운 시대의 풍요로움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예레 31,12; 호세 2,24 참조) 포도주는 서로를 비워 내어 서로가 만나서 만들어 내는 신뢰의 열매이지, 결핍으로 인한 제 집착의 성과물이 아니다.

카나에서의 이야기는 혼인잔치를 배경으로 한다. 혼인은 만남의 가장 완벽한 형태라서 상대에 대한 전적인 깨어 있음을 수반한다. 너에 대한 나의 깨어 있음, 너를 나의 영원한 반려자로 맞아들이려는 전적인 개방성, 바로 이것이 혼인이 가지는 매력이다. 혼인잔치의 자리에 포도주가 모자라는 것은 어쩌면 부수적인 사건일 뿐이다. 포도주가 채워지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신랑과 신부의 만남이고 그 만남 안에 어우러진 여러 인물의 ‘공동작업’이다. 이 ‘공동작업’이 제자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표징’이 되었다.

옷장의 옷이 넘쳐나는데도 모자란 듯 여겨지는 것은 나의 집착 때문이다. 버리지 못해서 집착한 것들로, 우리는 우리 주위를 제 삶에서 소거시킨다. 버리고 비워 내는 곳에 타인과 더불어 하나되는 내 삶은 ‘여전히’ 좋은 삶으로 기억되고 풍성한 삶으로 각인될 것이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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