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지난번 글에서 나는 해방신학의 출발점을 세 가지로 이야기했다. 그것은 자비, 윤리적 분노 그리고 연대다. 그리고 이러한 출발점은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삶의 정황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해방신학은 신학의 전개 현장을 가난이라는 삶의 자리로 삼고 있으며 가난의 상황과 더불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비, 그리고 참혹한 가난의 현실에 대한 윤리적 분노와 마침내 그 상황을 하느님 나라의 가치관 속에서 변화 시키려는 구체적인 연대적 프락시스(행동)로부터 시작되는 신학적 방법론임을 분명히 했다.

오늘은 해방신학의 방법론을 언급하고자 한다. 방법론을 다룬 뒤에는 해방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가난에 대해서 언급하려고 한다. 해방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신학의 방법론, 신학적 출발점과 더불어 라틴아메리카의 가난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헌신의 다짐과 약속

해방신학의 구체적 방법론의 전개에 앞서 요구되는 것은 신학의 전 단계적 성격이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와 헌신에 대한 다짐과 약속이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현실을 향한 깊숙한 참여, 연대를 통한 해방 과정의 동참에 대한 헌신과 약속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가난한 삶의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늘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장을 떠난 신학은 참 신학이 아니라 하나의 지적 유희이며 문학적 묘사 행위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방신학의 전개가 프락시스에 대한 신학적 성찰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적인 해방의 프락시스 과정에 참여하고 이에 대한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적 삶의 현실과 직접 접촉과 참여 없이 가난한 사람, 억압, 혁명, 새로운 사회와 해방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한낮 ‘말잔치’에 불과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처럼 해방신학의 신학적 방법론에서 절대적(?) 전제는 현장 참여다. 어쩌면 이러한 전 신학적인 전제는 해방신학으로 하여금 급격한 사회 변화에도 아직도 그 건재를 과시하고 특별히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로 인하여 인류와 온 우주의 삶이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 요즘의 사회에서 또 다시 새로운 인간과 사회 건설을 위한 신학적 대안으로 떠오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신앙과 신학과 삶의 행위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고 분리돼 있지 않는 모습을 해방신학은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페루 볼리비아 등에서 만났고 함께 활동했던 많은 해방신학자들과 또 해방신학적 사목을 하는 신부들과 목회자들의 삶을 잊지 못한다. 학문적으로 많은 명성을 얻었음에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자신이 해방신학을 전개했던 가난한 삶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수십 년 동안 열악한 삶의 현장을 지켜 오는 그 사람들의 겸손하고 검소한 삶의 모습과 천진난만한 얼굴에서 늘 퍼져 나가고 있는 미소들을 잊을 수 없다. 수십 년 된 낡은 소형 피아트 차를 타고 다니는 브라질의 친구 학자들과 신부, 나의 선생님이셨던 고 미게스 보니노 박사의 낡은 양복 윗도리, 앞니가 그대로 빠져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웃던 페루 빈민촌의 친구 학자, 브라질 상파울루 근교에서 만난 40년 동안 사목을 하는 아일랜드 출신의 노인 신부.... 삶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는 이들로 인해 해방신학은 일시적 현상으로 상황적 신학이 그러하듯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그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신학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과의 직접 접촉과 참여, 연대 그리고 행동으로 전개되는 신학이다. 해방신학은 이처럼 이론(신앙)과 프락시스(자비의 행위) 사이에서, 변증법적 관계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럼에도 해방신학의 방법론에서 우선인 것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이다. 자비의 행위(프락시스)가 첫 번째 신학적 행위이며 신학적 성찰은 두 번째 행위라는 것이다. 이 같은 방법론적인 특성이 해방신학으로 하여금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영성과 새로운 신학을 전개하도록 하는 것이며 우리의 신학을 새롭게 함으로써 신학의 해방을 가져 온다. 해방신학은 새로운 신학적 방법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방신학은 기존 신학에 새로운 정신을 넣어 주고자 하는 노력이며 우리로 하여금 새롭게 신학을 하도록 해 주고 있다. 정론은 정행 뒤에 오고 있다는 사실을 해방신학은 다시금 상기시킨다.

▲ 환경이 열악한 콜롬비아의 한 마을의 모습.(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가난한 사람들과 헌신의 형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방신학의 신학 전개는 가난의 현장에서 비롯된다. 가난의 현장과 직접적이고 지속적 접촉 없이 해방신학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탁월한 신학의 생산에서 현장 경험은 필연적 요소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경우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들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라틴아메리카라는 가난한 삶의 현장을 떠나 다른 곳에 체류하게 될 때는 스스로를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자로 칭하는 것을 스스로 삼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내 친구들 중에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장을 떠나 미국 신학대학으로 옮겨간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해방신학자로 부르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며 또 자신의 신학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년 몇 차례씩 라틴아메리카 현장을 방문해서 강연을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해방의 과정에 직접 참여를 하지 못하는 관계로 현직의 해방신학자로 불리기를 거부하는 겸손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해방신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현장을 향한 직접 참여와 헌신의 요소이다. 참여와 헌신은 해방신학으로 하여금 날마다 새로운 신학적 감수성을 갖도록 하여 신학의 해방을 이루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현장과의 관계에서 참여와 헌신은 어떠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각자의 처해 있는 삶의 정황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먼저, 해방적 신학과 목회를 하는 사람 중에서는 직접 가난한 삶의 현장에서 살면서 해방의 과정에 직접 투신하고 헌신하는 경우도 있다. 해방신학의 태동 초창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형태로 참여하고 헌신하였다. 그러나 작금에 와서 이러한 직접적 형태의 해방적 신학과 목회 형태는 감소되었다. 그것은 사회의 변화와 민중의식의 발전에 의한 자발적인 민중조직들의 생성이 활발해졌고 또 다른 측면으로는 해방적 성격을 가진 다양한 시민단체의 조직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직접 참여와 헌신의 필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정기적인 현장 방문을 통하여 해방적 신학과 목회를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참여와 헌신은 방문, 강연, 사목적 동행과 상담, 민중적 운동과 공동체에 대한 지속적인 신학적-목회적 지원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나의 경우에도 아르헨티나의 신학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번 5일 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약 1500킬로미터 떨어진 차코 지방을 방문하여 그 지역의 토착민 공동체를 위한 민중성서 읽기, 신학을 가르치면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그것은 거의 모든 교수들에게 공통적으로 부여된 의무 같은 것이었다. 다른 교수들은 도시 빈민 공동체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기도 했고, 일부 교수들은 학대받는 여성과 이민자를 위한 현장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당시 내가 가르치고 있었던 신학대학 소속 교수들은 모두 하나의 현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 현장을 통해 우리들은 우리의 신학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 갔고 또 현장의 프락시스의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신학을 매 순간 새롭게 성찰하고 전개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 다른 형태는 정기적인 방문을 통한 참여와 헌신 그리고 현장의 삶을 통한 참여와 헌신을 반복하는 것이다. 일정 기간 동안 가난한 삶의 현장에 직접 들어가 살기도 한다. 그러나 또 일정기간 동안에는 직접적인 삶의 형태를 떠나 교회의 목회 현장으로 돌아 온 뒤에 현장에 대한 정기적인 방문을 통하여 사역을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다.

해방신학 하기: 가난한 사람들의 의자에 앉기

이제 해방신학하기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확실해졌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삶의 현장에 대한 참여와 헌신이다. 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지만 누구라도 해방신학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참여와 헌신의 첫 관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누구든지 해방신학의 방법론을 배우고 그리고 그것에 의해 신학과 사목을 전개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의 삶의 의자에 앉아 보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과 그들의 억압의 삶을 체험하고 또 지속적으로 관계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에게 있어서 해방신학은 불가능한 신학 작업이 될 것이다. 나는 최근 3년 전부터 다시 라틴아메리카로 돌아와서 이들의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다. 얼마전 나는 페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여러 가지 이유(그중에서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큰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자발적인 차 소유 거부가 아니라 어찌 보면 반 강제적인 차 무소유이기는 하지만)로 차를 갖고 있지 못한 나는 멕시코시티에서 늘 만원인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다닌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우리의 이웃,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면서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의 교우들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생각을 해 왔던가를 깨닫는다. 그래서 나도 고 김근태 의원처럼 솔직히 지금이 더 좋다. 차가 없어서 걸어 다니거나 혹은 땀 냄새 나는 지저분한 멕시코시티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것이 더 좋다. 그러면서 반성하기도 한다. 내가 목사로서 또 신학 선생으로서 너무 큰 것만 생각해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멕시코시티에서 차가 없음으로 인해 이웃의 작은 고통을 보게 되고 그리고 그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서 신학과 목회를 생각하게 된 것은 때 늦은 감이 있지만 감사하다. 그래서 난 지금이 더 좋다. 2016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나는 차도 없고 가끔은 생활비 걱정도 하는 지금이 생활비 걱정 없었고 타고 다닐 차가 있었던 이전 시절보다 더 좋다. 그래서 감사하다.’라는 마음을 갖는다. 아 지금이 더 좋다!!!!!”

해방신학은 결코 차창을 통하여 바라보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 차에서 내려서 현장으로 들어가서 직접 경험하고 바라봄으로써 이루어진다. 해방 신학하기와 신학방법론은 결코 이론적, 사변적이지 않다. 그것은 지극히 실천적이고 경험적이며 행동적이다. 다음 글에서는 정행 이후에 발생하는 정론적인 신학방법론과 해방신학의 실천적, 이론적 기반 그리고 출발점이 되는 가난 이해에 대해 기술할 것이다. 가난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비롯되는 신학방법론이 어떻게 우리의 신앙과 사목 그리고 삶의 스타일을 바꿔 나갈 수 있는 가에 대해 말할 것이다.

홍인식 목사
파라과이 국립아순시온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신학대학 교수 역임.
현재 멕시코 장로교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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