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데기 밥상 통신 - 06]

솔직히 말해서 겨울철 손님맞이가 썩 내키는 일만은 아니다. 이 방 저 방 불 때고 하루 종일 부엌 난로에 불을 피우려면 나무가 어마어마하게 들기 때문이다. 그런 데다가 집에 있는 재료를 가지고 음식을 준비한다고는 해도 손님상을 차릴 때는 아무래도 부담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멀리서 온 손님인데 뭐라도 맛있는 걸 대접하고 싶어서 자꾸만 마음이 쓰이게 되니 말이다.

그럼에도 손님이 온다 하면 어지간해서는 거절하지 않는 까닭이 있다. 몸이 좀 힘들긴 해도 만남이 주는 그윽한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삶을 나누는 가운데 마주치는 고민의 지점을 확인하며 힘겨움을 토로하기도 하고, 소소하고 자잘한 일상 가운데 길어 올린 보석 같은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새 힘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 이런 게 사는 맛이로구나! 우린 이렇게 함께 살아가고 있구나.' 새삼스럽게 깨우치면서 말이다.

더구나 우리 아이들에게는 손님이 그야말로 존재 자체로 선물인 듯하다. 사람 귀한 줄 아는 산골에 사는 까닭에 손님이 오면 강아지처럼 몹시 반긴다. 집에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내어 자랑하고, 노래를 불러 주고 그림을 그려 선물로 주며 나름 손님 접대를 하는 것이다. 특히나 제 또래 아이들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아라 하는지....

▲ 우리는 지금 만두 빚기 놀이 중!. ⓒ정청라

그런 까닭에 방학을 맞아 우리 집에 더부살이 하러 온 여동생과 조카들을 나는 군소리 없이 두 팔 벌려 맞이하였다. 벌써 몇 달 전부터 약속이 되어 있던 터라 다울이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온 만남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9살, 8살, 6살, 4살 머스마들은 마주치는 그 순간부터 눈빛으로 서로 신호를 보내더니 쉴 틈 없이 뛰어노느라 정신이 없다. "구들장 무너지니까 방에선 뛰지 마라", "다치니까 조심해서 놀아라"며 잔소리를 해대지만 쇠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다는 걸 서로가 잘 안다. 그야말로 온 마을이 들썩거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만큼 활기찬 나날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원숭이 같고 망아지 같은 아이들도 숨죽여 집중하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먹을 때! 밥이나 간식 먹는 시간이 되면 절로 조용해진다. 가끔씩 "음~ 맛있네", "이거 먹고 또 먹고 싶다" 정도의 소리만 들리는 정도? 부엌에서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으면 하나둘 다가와 보이는 관심 또한 대단하다.

"이모 뭐해요?"
"토란 삶은 거 껍질 벗기고 있어."
"삶아서 껍질을 벗겨요?"
"응, 이렇게 하면 껍질이 잘 벗겨지거든. 이따가 이걸로 토란국 끓여 먹자."
"난 토란국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 어쩐지 맛있을 것 같다."
"나도! 빨리 밥 먹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여동생 얘길 들으면 집에서는 반찬 투정도 곧잘 하고 밥을 남기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집에선 밥그릇에 구멍이 날 정도로 싹싹 비우고, 시래깃국이나 청국장, 고사리 나물 같은 것도 맛있다고 잘 먹는다. 하루 종일 뛰어노니 밥맛이 좋을 수밖에.... 군것질 거리를 사다 먹는 일 따위가 없으니 입맛을 버리지 않아서 음식의 참맛을 깨닫게 되는 것이기도 하리라.

이렇게 해 주는 대로 뭐든 잘 먹는 꼬마 손님들을 위하여 나는 야심찬 메뉴를 준비하였다. 바로 호박죽과 만두! 마침 합천에 살 때 친하게 지내던 이웃이 애 둘을 데리고 온다기에 겸사겸사 일을 벌인 것이다. 속이 주황빛으로 예쁘게 물든 호박을 잡아 아침부터 푹푹 삶고, 만두소를 위해 여러 가지 재료도 준비하였다. 말린 죽순 불려서 삶아 놓고, 호박 나물 불리고, 고구마 쪄서 으깨고, 두부는 물기를 짜고, 당면은 살짝 데쳐 다지고.... 거기에다 양파와 백김치까지 잘게 다져 넣어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였다. 만두피까지 밀 여력은 없어서 지난번 생협에서 장 볼 때 미리 사다 놓았으니 그것으로 준비 끝!

난로 위에서 호박죽이 팔팔 끓는 동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밥상 앞에 둘러앉아 만두를 빚었다. 먼저 내가 시범을 보이고 천천히 따라해 보라고 하니 아이들은 사뭇 진지한 자세로 만두 빚기 놀이에 빠져든다. 조막손을 꼬물거리며 웃긴 모양을 개발해 내기도 하고, 남 몰래 만두소를 훔쳐 먹기도 하고, 훔쳐 먹다 들켜 핀잔을 듣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납작한 주머니 같은 납작 만두, 속이 꽉 차다 못해 터져 나온 터진 만두, 만두소는 거의 없고 만두피만 접힌 빈주머니 만두 등 다양한 만두가 만들어졌다. 사람 손이 무섭다고 한 그릇 수북하던 만두소도, 60장이나 되던 만두피도, 어느새 다 팔려 버린 것이다.

이제는 만두를 찌는 시간! 아이들은 노는 것도 잊고 만두가 익기만을 기다렸다. 어쩐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만두를 먹게 될 것 같다는 둥, 고기가 안 들어가서 맛이 괜찮겠냐는 둥 저희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말이다. 아무튼 만두가 익는 10여 분 동안 아이들은 얼마나 애가 탔는지 "다 익었어요?", "언제 익어요?", "아, 배고프다" 소리를 쉬지 않고 내뱉었다.

▲ "만두 다 익었대요. 빨리들 오세요." 초조한 표정으로 먹기를 고대하고 있는 아이들. ⓒ정청라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려서 마침내 찐만두 접시가 상에 오르자, 뜨거운 줄도 모르고 손에 들고 호호 불어 먹는다. 그렇게 첫 접시는 게눈 감추듯 사라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접시까지도 그렇다. 어른들은 감히 손을 뻗기 어려울 정도로 맛있게들 먹는다.

"고기가 안 들어가도 맛있네. 엄마, 우리도 집에 가서 이렇게 해 먹어 보자."
"내 납작 만두 어디 갔지?"
"만두피만 있는 건 누구 작품이야?"

만두 밥상 앞에서 실컷 만두 이야기로 꽃을 피우더니 배가 부르자 슬며시 사라져 다시 뛰어논다. 만두 먹은 힘으로 더 크게 웃고 더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말이다.

그런 아이들 모습을 지켜보며 찐만두 하나 먹기까지 내가 보낸 온 하루가 꽉 찬 보람으로 다가온다. 번거롭고 성가신 일이긴 해도 아이들과 과정을 함께 했을 때 느끼는 가슴벅참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다. 먼 훗날 이 아이들에게 '만두' 하면 떠오르는 겨울날의 추억이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큰 힘이 될 수 있을지 누가 아는가. 아니, 아이들에겐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시간이 많이 흘러도 이 어여쁜 아이들과 함께한 알찬 시간은 언제까지라도 내 속을 든든하게 채워 줄 것 같다. 속이 꽉 찬 만두 한입 베어 문 것처럼.

정청라
산골 아낙이며 전남지역 녹색당원이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이 늘 얼굴이며 옷에 검댕을 묻히고 사는 산골 아줌마. 따로 장 볼 필요 없이 신 신고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지천인 낙원에서, 타고난 게으름과 씨름하며 산다.(게으른 자 먹지도 말라 했으니!) 군말 없이 내가 차려주는 밥상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서, 나날이 부엌데기 근육에 살이 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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