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실수로 뒤범벅 된 여행. 절망해야 하나?

교통비에 입이 쩍쩍 벌어지는 유럽에서, 여행 중인 학생에게 기차를 놓치는 것만큼 아찔한 상황은 없다. 더군다나 환승을 여러 번 해야 하는 경우, 첫 번째 기차를 놓쳐서 도미노처럼 모든 기차를 놓쳐 버렸을 때. 심지어 그것이 마지막 기차였기 때문에 원래 도착 예정지의 예약한 숙소에 체크인하지 못하고, 내린 기차역 근처에 급하게 숙소를 잡아야 한다면. 그날 밤은 엄청난 우울함과 자기 혐오, 그리고 돈 걱정에 시달리게 된다.

나는 왜 늘 이렇게 되는 것일까. 왜 늘 실수투성이에, 계획적이지 못한 것일까. 자책 속에 시달리던 그때, 150년 전 존 스튜어트 밀의 한 마디가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우리는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자기 식대로 인생을 살아가다 일이 잘못돼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런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게 되면 다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는 길로 억지로 끌려가는 것보다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다.”

다시 되짚어 봤다. 뒤집어 생각해 봤다. 왜 그 기차를 놓쳤는가? 베네치아를 떠나기 한 시간 전, 한 현지인에게 길을 물었는데 그 사람이 마침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자연스레 이야기를 이어 갈 수 있었다. 길 안내도 해 주고, 성당과 그림에 대한 설명도 해주고, 덕분에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생각보다 늦게 역에 도착했고, 그제서야 사전 예매를 잘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찍 왔으면 미리 표를 확인하고, 바꾸고 일정에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봤다. 분명 나는 한 시간의 더 영양가 있는 시간을 보냈잖아? 이탈리아에서 연속 3개의 기차를 놓치는 경험을 했잖아? 다른 여행자들보다 이탈리아 철도 직원과 많은 말을 주고 받았잖아?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런 경험이 더 유익한 것 아닐까? 그 정도면 쌤쌤(same same) 아닌가?

어찌 보면 자기합리화다. 이것은 분명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 주목하고자 하는 건 자신의 방식에 대한 후회가 결코 탄식의 나락에 빠져 있던 자기 자신을 구할 순 없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또한 분명 베네치아에서의 마지막 1시간은 참 즐거웠다. 기차역을 헤맸던 그 시간에도 어이가 없긴 했지만 상황에서 오는 우스움에 몇 번을 웃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돈을 더 써야 했던 것 빼고는 그다지 나쁜 것도 없어 보이는데?

▲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전 앞에 꾸며진 구유. 인물 모형은 제각기 다른 신분, 다른 복장, 다른 포즈이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변지영

그 방식을 고수해도 되는 이유

한국에 돌아가면 졸업까지 단 두 학기밖에 남지 않은 대학생은 이 에피소드를 회사 면접에 들고 갔다고 가정해 봤다. 어떤 회사냐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지레 겁먹을 가능성이 높다. ‘저 사람을 썼다간 회사에 구멍이 나겠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저 사람은 어떤 상황에 놓였든 그 상황의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는 것에선 최고겠군. 위기상황 대처능력이 아주 좋아! 마인드 컨트롤도 좋은걸?’

“자유론”으로 널리 알려진 존 스튜어트 밀도 실수투성이에 자기합리화의 대가였을까? 그가 그토록 ‘자기만의 방식’과 ‘다양성 보존’을 주장했던 데에는 훨씬 넓고 깊은 이유가 있다. 그는 생물의 종 다양성을 들어 비유한다. 종 다양성이 중요한 이유는 유전적 다양성이 보존되지 않는다면 그 종 자체가 안정성을 잃고 쇠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약 사람들 중에 영하 30도에서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느 날 갑자기 지구 전체가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졌을 때 그날로 인간은 멸종한다. 영하 30도에서 살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영상 40도에서 살 수 있는 사람도 있을 때, ‘인간’이라는 종은 훨씬 더 안정적이다.

사회에서 ‘생각의 다양성’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생각의 다양성의 중대함에 대해선 종 다양성의 그것에 비해 잘 느끼지 못하는 편이지만, 이 다양성이 우리를 관용과 개방의 미덕으로 이끌 수 있다. 다양성에 대한 풍부한 경험은 사람을 개방적이고 관용적이게 한다. 그들은 여유로워진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가 나타난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방식을 주장한다고 해서 꼭 내 자유가 줄어드는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또 그로 인해 우리는 비로소 더 넓은 그림을 볼 수 있게 된다.

사회제도라는 것은 수많은 방식 중 하나의 선택이다. ‘선거론’이라는 수업을 수강하며 뒤통수 맞듯 강렬히 와 닿았던 교수님의 한 마디가 있다.

“다수대표제, 소수대표제. 상대다수대표제, 절대다수대표제.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이것들 중 어느 하나가 더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어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다수의 의견을 채택한 것일 뿐이에요. 모든 제도가 다 각각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죠. 우리가 만약 어느 한 제도의 장점만을 혹은 단점만을 바라본다면 큰 그림을 볼 수 없게 돼요. 발전이 없죠. 더 큰 맥락 안에서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보완할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그제서야 이해되지 않았던 밀의 “자유론” 한 문장을 비로소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회의 목표가 멋진 시스템을 갖춘 기계 만들기가 되면 안 된다. 대신 다양성이 보존된 생동감 넘치는 조직 만들기가 되어야 한다.’

다양성은 제도를 제도로서 관찰하고 성찰하게 한다

강의 흐름을 읽으려면 강 밖으로 나와야 알 수 있다. 다양성에 대한 경험은 우리를 강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잘못된 자기합리화를 중단하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다. 너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나의 생각도 수많은 생각들 중 하나일 뿐이며 불변의 진리가 아니므로 꼭 이것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싸울 필요가 없다. 내 방식이 아니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 필요도 없다.

다양성은, 그로 말미암은 관용의 자세는 우리를 제도 밖에서 ‘제도를 제도로서’ 관찰할 수 있도록, 성찰할 수 있도록 한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보수라고 해서, 진보라고 해서 무엇 하나가 더 우월한 것은 아니다. 그 둘의 목표는 선(善)의 국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상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그 둘을 나누는 것은 과정에서의 방법론이다. 그래서 보수는 보수정치의 장단점을, 진보는 진보정치의 장단점을 충분히 인지해야 한다. 또한 왜 상대방이 그것을 포기하고 저것을 택하려는 것인지, 그 기회비용이 무엇이었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저들의 방식보다는 이 방식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충분히 성찰하고 서로의 의견을 나눠야만 한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밀이 말하는 생각의 다양성의 중대함이다.

남들과 너무 다른 나. 괴짜가 많은 사회. 이것은 축복이다! 우리는 갑자기 지구가 영하 30도가 되어도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종은 쇠퇴하지 않을 것이고 안정적이다!

남은 여행도 그저 즐기기로 했다

나는 실수투성이에 계획적이지 못하다. 때론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놓친다. 하지만 상황 대처능력이 좋다. 상황의 좋은 면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있다. 수많은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다. 사고방식이 유연하다. 기차는 내일에도 있다. 자, 아직도 자기합리화라고만 할 것인가? 고맙게도 밀의 “자유론”에는 주옥 같은 한 마디가 또 있었다.

“단지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서 기존의 올바른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덕분에 실수를 피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적절한 공부와 준비 끝에 자기 혼자 생각하다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이 진리의 발견에 더 크게 기여한다.”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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