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월 10일(주님 세례 축일) 이사 42,1-4.6-7; 루카 3,15-16.21-22

사람은 같이 어울려 사는 데 익숙한 나머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나 사랑은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자기 소외 현상과 더불어 어김없이 나타나는 건, 나와 함께 있는 이들, 특별히 잘나 보이거나 잘났다고 일컬어지는 이에게 기대는 버릇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개 정치인들에 대한 민중의 처연한 태도에서도 강하게 작동한다. 정치인들에 대한 기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다. 다만, 그 기대가 정치인들의 능력이나 자질에서가 아니라, 민중의 ‘게으른(?)’ 무관심에서 기인할 때가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정치를 제대로 보고자 하는 노력은 상당한 힘을 필요로 한다. 제대로 보기 위해선 주위에 일어나는 일과 그 인과관계 등, 챙겨 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회적 주체로서 자신을 잃어버린 이들이 가지는 정치인들에 대한 기대는 자기 자신과 그 삶에 대한 게으르고 허황된 욕망의 투사일 뿐이다.

요한에 대한 민중의 기대 역시 그러했다. 요한이 살아갔던 시대는 메시아에 대한 바람이 민중 개개인의 좌절과 포기를 기반으로 한 영웅주의에 기대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식민주의를 살던 민중은 메시아가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은 애당초 없었다. 그가 누구든 메시아라면 지금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내 주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민중은 그들의 현실 삶을 너무나 싫어해서 역설적이게도 너무나 그 현실 삶에 붙들려 있었고 그로 인해 참된 메시아는 볼 수도, 보려 하지도 않았다. 너무 심하게 갈구하면 그것에 파묻혀, 새롭게 다가오는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편견에 빠지니까.... 민중은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메시아는 소외되었다.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요한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했다. 자신이 소거된 자리에 새로운 기대를 불러일으킬 메시아를 불러오는데, 그가 예수다. 요한이 예수를 소개하는 방식은 철저한 자기 낮춤이다. 예수의 신발 끈조차 풀어 내지 못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격하시키는 것은 예수와의 관계 안에서 종보다 못한 자리를 굳이 차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예수 시대 랍비들은 그들의 제자들에게 주인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한다. 마치 종이 주인을 대하듯 랍비들의 제자들은 스승을 모셨다. 그런데 신발 끈을 푸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종이라도 주인의 신발 끈을 풀어 주진 않았다. 그건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요한이 예수의 신발 끈조차 풀지 못한다 한 것은 종보다 더 낮은 자리, 모든 것을 내어 놓고 버릴 수 있는 자리를 택했다는 철저한 자기 낮춤이다.

메시아 예수는 요한의 ‘자기 낮춤’을 발판 삼아 근엄한 도인이나 현인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예수의 등장은 기대에 찬 민중의 바람과는 전혀 달랐다. 예수는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오히려 죄인들이나 받는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으로 등장한다. 요컨대, 메시아 예수는 종보다 낮은 자리를 스스로 선택한 요한보다 더 낮춘 모습, 곧 ‘죄인’ 예수로 등장한다. 신약성경 곳곳에 예수는 죄 없는 이로 소개되는데(2코린 5,21; 히브 4,15; 7,26; 1베드 2,22; 1요한 3,5 참조), 죄 없는 이가 죄인이 된다는 사실은 하나의 ‘자기 부정’이다. 더 큰 능력을 지닌 채, 자신 아닌 모습으로 처연히 내려앉을 수 있다는 것은 희생이란 말로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이것은 죽음처럼 지독히 힘든 일이어서 사실상 죽음에 가까운 것이다. 예수는 실제로 죽어 갈 것이다. 그 죽음이 이 세상의 죄인들의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 세례 사건의 핵심이다.(로마 6,4; 콜로 2,12 참조) 예수는 하느님이되,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 그래서, 기다려지는 메시아가 아니라 이미, 여기에 사람으로 하나된 메시아로 등장하는 것, 이것이 예수 세례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바다. 기다림엔 새로움이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현실 삶을 받아 내는, 그것으로 지금 내가, 우리가 처한 삶과 시대를 제대로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메시아 예수는 자신의 세례로 증거한다.

예수의 세례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며,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이 땅과 저 하늘을 하나로 묶어 낸다.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묘사되는 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이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인데, 그 묘사의 끝이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유일하다. 죄인의 모습으로,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온 예수만 하늘과 땅을 하나로 엮어 내는 유일한 사랑의 시작이요 마침이다.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도래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죽음으로 빚은 사랑의 결실이다. 세상 권력 속에 위엄을 갖춘 임금으로서가 아니라,(시편2 참조) 어디 내놔도 보잘것없을 만큼 초라한 메시아, 죄인 예수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하느님이 기특해 마지않는 메시아의 본모습이다.(이사 42,1 참조)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 경쟁 속에 허덕이는 삶에 지칠 대로 지친 것 같다. ‘더, 더 더’ 좋은 것, 멋진 것, 대단한 것에 ‘환장’한 환우들이 우리 곁에 상존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세상 뒤집어엎을 영웅이 아니라, 세상 속에 스스로에 대한, 우리에 대한 질문을 차분히 던져 볼 여유와 시간이다. 우린 영웅 옆에 기생하려고 이 세상에 사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삶 안에 메시아를 만나 뵈려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 삶이 어떤지, 스스로를 죽여 가며 오시는 메시아가 머물 만한지 먼저 되돌아보는 게 신앙인이 가질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성당에서 묵주 들고 세상의 각박함을 잊고자 하는 이에게 메시아는 도대체 소용이 있을까.... 예수를 받아들이는 건, 지금 현실을 살아 내는 것으로 족하다. 있지도 않을 유토피아에서 예수를 기다리는 허황된 꿈일랑 벗어 던져 보는 것, 그거면 족하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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