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다시,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습니다. 조금은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새롭게 무엇인가 다짐도 해 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맞는 새해도 어느새 헌 것, 낡은 것이 되기 마련이란 것을.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코헬 1,9) 우리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바라고 얻기도 하지만, 그 새로움은 이내 사라지고 맙니다. 무엇인가 얻었는가 하면, 어느새 잃고 마는 것, 우리의 삶입니다.

사실, 인간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실의 연속입니다.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엄마의 몸속, 모태의 그 안온함, 따뜻함과 이별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의 우리 삶은 처음부터 상실로 시작되는 겁니다. 모태 속의 삶을 잃고서야 우리는 세상 속에서의 삶을 새롭게 얻습니다. 언젠가는 죽음으로, 우리는 정들었던 세상과도 결국 이별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삶은 상실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정작 배워야 할 것은 얻는 법이 아니라 놓는 법일지 모릅니다. 삶은 소유가 아니라 상실입니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채우는 우리의 삶이 사실은 상실의 과정임을 깨닫는 것, 삶에서 놓쳐서는 안 될 소중한 통찰, 지혜가 아닌가 합니다.

모든 것은 사라져 갑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언젠가는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과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합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진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영원’과 ‘절대’에 눈을 뜨기 때문입니다. 상실의 대면, 영원과 절대에 눈뜸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삶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필요로 하는 것들은 좋은 것이지만, 영원한 것도 절대적인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고 보게 됩니다. 삶의 목적과 수단을 서로 뒤바꾸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좋음을 음미하고 누리되, 거기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진정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영원’을 의식하는 것은 우리를 예속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합니다. 예속은 오히려 ‘절대’가 사라졌을 때 일어납니다. 세상의 어떤 것이 자기가 마치 영원과 절대인 양 행세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모든 것은 여기에 예속되고 맙니다.

▲ 일본군 위안부의 아픈 역사를 기억한다는 뜻으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앞에 세워진 '평화비'. ⓒ강한 기자

우리 현실을 바라봅니다. 학교 교육은 자율적이고 창의적 인간을 길러 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순응의 인간을 양산하는 구조로 왜곡되어 수많은 청소년들의 목을 짓눌러 온 지 이미 오래입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법제도는 이 땅의 많은 노동자들에게 구조적 고통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개발이란 명분으로 이 땅의 소중한 갯벌과 강과 산이 파괴되었거나 곧 파괴될 운명에 처했습니다. 멀쩡한 사람과 가정을 파괴하는, 화상경마도박장을 비롯한 온갖 도박장이 이른바 ‘사행산업’이란 이름을 달고 도심 한가운데서 버젓이 영업을 합니다. 얼마 전, 한국과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가역적”으로 최종 해결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습니다. 피해당사자들인 위안부 할머니들을 협상과정에서 철저히 소외시키더니, 터무니없는 협상 내용을 “대승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소위 ‘국익’에 도움이 되니 ‘개인’은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다.

돈과 권력, 풍요와 편리, 모두 우리의 삶에 필요하고 좋은 것이나, 결코 절대적인 것도 삶의 목적도 아닙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이런 것들이 절대적인 자리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습니다. 무엇이든 여기에 도움이 되면 좋은 것입니다. 걸림돌이 되는 것은 침묵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제거되어야 합니다. 세속화된 오늘의 세상에서, 신은 죽지 않았습니다. 교체되었을 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형태의 물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섬기도록 강요받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나’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몹시 어렵습니다. 타자는 내게 필요할 때에만, “돈과 권력”, “풍요와 편리”에 도움이 될 때에만 나의 관심사가 됩니다.

2016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지적하셨듯이, 하느님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 공동의 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합니다. 우리의 무관심은 “불의와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을 일으킵니다. 갈등과 분쟁은 필연적이고, 평화를 위한 자리는 없어집니다. 영원과 절대에 대한 감각이 사라진 세상, 하느님이 배제된 세상, 물신이 지배하는 세상은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 바로 평화입니다. 세상의 평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필요합니다.(요한 14,27 참조) 이 평화를 누리려면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극복해야 하고, 이는 다시 하느님에 대한 관심을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 회심입니다. 회심,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놓는 것을 뜻합니다. 성탄 시기는 회심을 위한 때이기도 합니다. 육화를 통해 영원과 절대인 하느님께서 세상으로 들어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스러져갈 우리가 영원과 절대를 보고, 또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육화의 사건을 직접 겪은 젊은 여인 마리아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새겼으면 합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그럴 때, 우리는 영원과 절대인 하느님의 현존을 보다 깊이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놓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절대적으로 지배하던 것들도 제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창조질서의 회복입니다. 세상에 정의와 평화가 도래할 것입니다.(“사목헌장”(기쁨과 희망) 78항 참조)

새해, 평화를 기원합니다.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