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Cristo
동생 중 한명의 별명이 '스크루바'이다. “♬이상하게 꼬였네.... 삐이 삐이♪♪ 꼬였네....♬”라는 얼음과자 선전의 내용처럼 가끔 바라보는 것, 말하는 것 마다 무언가 꼬여 있을 때가 많다. “어째서? 왜? 꼭 그래야 돼? 정말 그런거야? 이렇게 해서는 왜 안되는 것이지?....”

그 애는 모든 것을 프리즘을 통해서 바라보는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은 각자의 시각과 통찰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한다. 나 또한 나만의 프리즘을 통해서 보겠지만....

내가 쓰는 편지, 이메일이나 글의 머리에는 ‘En Cristo’ 라는 글귀를 꼭 챙겨 넣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뜻이다. 무엇을 하든 했든 그리고 하루의 반성에도 정말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였는가를 돌아보기 위해서다. 솔직한 고백을 하자면 지금까지의 많은 일들 중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대부분 나의 일들을 그리스도로 잘 포장하여 내세울 때가 더 많지 않았나 싶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늘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글귀이자 지금도 나에겐 양심의 잣대이다. 하루를 마무리 하는 시간에 이 단어를 되뇌며 가슴을 치는 부끄러움을 느끼더라도 나를 위해 어디서든 바라볼 수 있게 하여 잘못 향하는 양심을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머물고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그분의 세상을, 그분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1500년 Tretyakov 갤러리, 러시아

자! 이콘을 바라보자.
전체적으로 보는 순간 느낌이 오듯이 성 토마스의 의심(불신앙)이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고 자신이 직접 손으로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 눈으로 확인해야만 믿겠다고 말한 토마스 사도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에게 당신의 상처에 손을 넣어 보라고 하시자 토마스는 창에 찔린 옆구리에 손을 넣는 장면이다. 그의 붉은빛 옷에서 느껴지듯 주님께 대한 사랑은 누구보다 열정적일지 모르지만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는 토마스는 진지함 보다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놀라웠다.

현관 뒤에 솟아 있는 삼나무의 휘어짐은 마치 구부리고 있는 제자들과 함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들도 토마스의 말대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까. 사도들은 토마스의 의심을 나무라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결과를 지켜보고 있는 듯 하다.

제자들이 모여 있고 그 중앙에 그리스도가 계신 곳의 뒤로 한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은 최초의 성당을 생각게 하며 닫혀 있는 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을 기다리는 듯하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심과 마음의 평화를 잃게 하는 일들 속에서 이콘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다듬어 주시고 갈라진 마음을 모아 주심을 느낀다. 그래서 이콘은 봉인된 거룩함이 묻어 있다고 하나보다. 이콘을 바라본다면 바로 은총의 공간으로 초대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이콘의 중심부를 바라보자.
토마스 사도는 직접 눈으로 확인 후 떨리고 두려움과 기쁨으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신앙 고백을 한다. 그러나 그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뜻밖에도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토마스 사도의 고정되어 있는 신앙에 새로운 프리즘을 선물하시며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우리의 신앙을 토마스 사도를 통해 스스로를 보게 한다. 그리고 주님께로 향하는 나의 믿음에게 질문한다.
‘너는 보지 않고도 믿느냐?’

주님은 당신의 영(靈)적인 옆구리에 나의 육(肉)적인 손가락을 넣게 하신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임종숙/ 루시아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원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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