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죄와 어리석음에 대한 주제에 관심을 가졌던 작가는 <최후의 날>(도9)이라는 작품의 바깥쪽 날개 왼쪽에 역시 순례자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그는 성 야고보이다.(도9-1) 그의 모습은 순례자의 모습으로 조각(도10,10-1)과 그림(도11)과 필사본(도12)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다. 성야고보가 걷고 있는 풍경은 어둡고 위협적이며 폭력이 난무한다. 이는 성야고보가 여행의 안전을 기도하는 순례자의 수호성인임을 상기시킨다. 지금도 사람들이 걷고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만날 수 있는 성인은 바로 야고보이다.(도13)
 

도판 9



 

 

 

 

 

 

 

 

 

 

 

 

 

 

 

도판10-1






 

 

 

 

 

 

 

 

 

 

 

 

 

도판11


몇몇 순례자들의 경우 단순히 방황하는 행위로 충분하지만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지난날의 사건들로 신성해진 땅을 밟는다는 느낌이 반드시 필요했다. 신비한 영역에서 두려움과 경이감을 느끼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실제로 걷는 순례자의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말하자면 순례자는 앞서갔던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결국 순례자들이 밟는 땅이 순례지가 된 이유는 사람들에게 순례의 방향을 제시한다. 순례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은 맨 처음에는 그리스도가, 그 뒤에는 그의 제자들이 걸었고 죽어갔던 삶의 자취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람들과 하나가된다. 그러므로 순례자들은 순례지 방문을 통해 기적을 바랬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정신적 자유와 신앙의 비전을 경험하고 싶어 했다.

다음에 제시하는 두 그림은 바로 그러한 비전을 그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거나 순례를 다녀왔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기증자들의 염원과 일치하는 것들이다. 먼저 메로데 제단화로 알려진 그림이다. (도14)은 역시 세 폭의 제단화이다. 이 제단화의 중심 주제는 성모영보와 관련된 그림이다. 중앙패널은 우리에게 익숙한 성모영보의 장면을 보여준다. 순례와 관련한 인물이자 기증자인 사람은 왼쪽 패널에서 보인다.(도14-1) 그는 문을 열고 이 장면을 목도하고 있다. 실제 그가 이 비전을 경험했는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다. 이 그림은 실제장면의 고증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례를 통해 이 비전을 경험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가 있는 성벽의 꽃은 장미이며 이 장미는 성모의 정원에 있는 장미이다. 그는 그의 모자에 그 장미를 꽂고 있고 그의 부인은 묵주를 들고 있다. 그들은 순례자였고 이 비전을 경험할 수 있는 곳에 갔던 것이다.

 


 

 

 

 

 

 

 

 

 

 

 

 

 

 

 

성모영보를 떠올릴 수 있는 곳, 나자렛 말고도 유럽에는 성모영보와 관련된 두 곳의 성지가 있다. 영국의 월싱햄(Walshingham)과 이태리의 로레토(Loreto). 이러한 성지들은 시각적으로 실제 장소 나자렛보다는 제단화 속의 이미지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림 속의 사물들은 성모의 집을 그대로 천사가 옮겨왔다는 성스러운 집들에서 볼 수 있는 오브제들이다. 그곳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제단이 있는 소성당들이고 사제가 썼던 대야와 타월들로서 성찬식의 비품들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도14-3) 아마도 순례자가 무릎을 꿇고 마주대하고 있는 문은 월싱햄의 출입문, 즉 ‘기사의 문’으로 여겨진다. 입구이자 문은 성모의 공간과 순례자가 있는 세속을 이어주기도 하고 분리시키기도 하는 관문이다. 순례의 행위는 마침내 성모를 만나게 해 주었다.


또 다른 그림(도15)은 예수의 매장이 중심 주제가 되는 그림인데 이 작품 역시 제단화이다. 제단화의 왼쪽 날개에는 먼 길을 걸어온 순례자가 있다.(도15-1) 그는 아마도 순례의 마지막 목적지에서 예수의 매장을 바라본다. 역시 이것이 실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만나기 위해 그는 예수가 걸었던 길을 걸었고 그의 뒤에 보이는 십자가가 세워진 골고타를 지나왔다. 마침내 그는 그가 만나고 싶었던 예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제단화를 통해서 사람들은 매장되고 있는 예수를 본다. 마음으로든 실제로든 예수가 걸었던 그 길을 함께 걸으면서 예수의 고통을 함께 지고 예수의 죽음과 더불어 고통을 내려놓는다.

이러한 제단화는 제단화를 봉헌하는 봉헌자, 즉 기증자의 영적인 비전을 감상할 수 있게 하고 관찰자가 기증자를 통해 그들을 대신해서 기증자가 대리적 탄원을 하게 만든다. 기증자는 예수에게 다가가는 대리적 실체가 되었다.

도판15-1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한 처에서 다른 처로 옮겨 걸을 때 마음속에서 상상의 순례를 떠난다. 그 과정 속에서 때로는 고통을 음미하고 그리스도와 고통을 공유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 중세의 많은 사람들도 순례를 가고자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갈 수 없을 때 이렇게 상상의 순례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때로는 직업 순례인을 고용하여 대리 순례를 시키는 관습도 있었다. 자신에게 순례를 위탁한 이들의 반지 같은 소지품을 가지고 가서 성지의 성물에 갖다 대거나, 기도를 통해 면죄를 대신 구했고 순례의 증거와 기념으로 성지에서 기념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정도 되면 그림을 통해 했던 상상의 대리순례 또한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가. <매장>과 <메로데> 제단화는 가상의 순례 퍼포먼스 속에서 시각적 보조물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작품들은 특별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제단앞에 그들의 봉헌이 이루어지도록 염원하고, 계속적으로 성지를 방문하는 것을 상기시키면서(때로는 성지방문의 향수 속에서), 그들이 순례에서 얻은 가치를 기억하고, 영적인 진보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었다. 또한 이렇게 해서라도 순례를 가고자 했던 중세인들의 열망은 순례가 대중적 문화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순례는 일단 떠나야 한다. <매장>에서 길을 따라 가는 것과 <메로데>제단화에서 문에 들어서는 것은 관찰자의 순례와 기증자의 순례가 자신들이 속한 도시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과 도시의 삶으로부터 고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다. 특히 <메로데>제단화의 벽은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지역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순례자가 벽에 의해 은둔함을 보여준다. 결국 순례는 물리적 공간을 바꾸는 것 일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세속에 두지 않고 천국의 도시 예루살렘을 염원하며 가는 긴 여정으로 받아들여진다.

순례는 하나의 변화된 개인, 영적으로 그의 풍부해진 경험처럼 다시 사회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성녀 브리짓은 성지에서 성모의 비전을 경험하고 성모의 말씀을 듣는다. “성지를 방문하려고 결심한 이들에게 나는 권한다. 게으르지 말고 더 성스러움 삶을 살아라. 그리고 나의 아들과 나는 육체의 삶을 살았고, 죽었고 그리고 성지에 묻혔다. 흔들림 없이 변함없는 믿음 속에서.” 순례자는 순례에서 돌아와 더 독실한 방식으로 살도록 영적인 권고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순례 길을 걷는다. 순례자는 단순한 보헤미안 방랑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람들이 걸어온 길을 걷는다. 대표적인 예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일종의 열풍처럼 책과 미디어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그 길 끝에서 중세와 이후 사람들은 무엇을 찾았는가. 어떤 이는 그도 모자라 산티아고에서 다시 출발한 곳까지 되짚어 가기도 하고 인생에서 몇 번을 반복하여 또 이 길을 걷기도 한다. 우리가 찾은 것은 도착하는 끝에서가 아니라 걷는 그 길에서가 아닐까?

/최정선 2008.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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