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신부] 1월 3일(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 2,1-12

오늘 복음의 흐름을 이끌고 가는 동방박사의 등장은 미지의 세계에서 구체적인 세계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동쪽 어딘가에서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움직인다. 움직여 나아가 다다르는 곳, 그곳에 한 아기가 있다. 그 아기는 장차 온 민족을 다스릴 분이시다. 동방박사가 페르시아의 현자이든, 사제이든, 또 아니면 점성가이든간에 그들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다. 그들이 움직이는 이유에 그들의 존재가치는 소용된다.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아기께 경배하기 위한 그들의 발걸음이 그들을 변호하고 있다.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다른 한편, 오늘 복음은 또 다른 흐름을 이야기한다. 동방박사의 흐름과는 대조적인 흐름이다. 헤로데가 이 흐름의 중심에 있는데,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길을 떠난 반면, 헤로데는 움직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오게끔 한다. 수석 사제와 율법 학자들이 헤로데에게 나아갔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움직이던 지도자들이었다. 유대의 정치적이고 공식적인 왕 헤로데가 유대의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수석 사제와 율법 학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서로 어울려 문제 삼는 것은 동박박사들이 찾고 있는 그 아기가 아니다. 메시아의 문제를 끄집어 내고 있으되, 메시아를 찾고자 함이 아니라, 메시아의 탄생 장소를 애써 문제 삼는다. 다스리고 있는 이가 다스릴 분이 태어난 곳을 찾는 것, 헤로데의 말대로 경배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다. 헤로데가 새로 태어난 유대인의 왕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궁금해하는 이유는 다스림의 자리는 오직 자신이 머무는 데라야 마땅하다는 정치적 이유 때문이다. 헤로데는 움직이지 않았다. 헤로데는 그냥 그렇게 자신의 왕국을 자신의 자리에서 지켜 내고 싶었다. 헤로데의 권력욕은 미카 예언자가 언급한 메시아의 고을, 베들레헴(미카 5,1)을 메시아의 기쁨이 아닌 살육의 슬픔으로 덧칠해 버릴 것이다.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 앞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내어 놓는다. 이 예물들은 유대의 진정한 왕이 바로 아기 예수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옛날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이사 49,23; 60,3), 세상의 왕들이 이 아기의 탄생을 경배하듯 동방박사들은 예물을 내어 놓는다. 저 멀리 동쪽에서 이곳 작은 집, 소박한 아기 앞으로 세상 모든 왕권이 머리를 숙인다. 세상의 권력이 지향하는 곳은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권력이 거들떠 보지 않는 베들레헴의 어느 촌락이었다. 화려한 궁궐에 살며 정치권력에 취해 버린 헤로데, 메시아를 기다리며 공식적인 종교 체제 안에서 제 자리를 탐하던 수석 사제와 율법 학자들.... 그들은 여전히 베들레헴을 거들떠 보지 않으며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아기 예수는, 그 아기가 설사 메시아로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숨겨져 있고, 숨겨져야만 하는 걸림돌일 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해 경악했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는지 사람들은 스스로 저주했다. 종교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찌 이런 지경에 까지 세상을 방치할 수 있는지 종교 역시 경악했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바닥의 경험’ 속에 진정한 하느님은 또 다시 인식되고, 그것으로 사람들은 다시 하느님을 섬기게 되곤 한다. 예컨대, 종교는 ‘케노시스’, 곧 비워 냄(필리 2,7)의 신학을 재인식한다.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 하느님의 초월성은 비워 내고 비워 내고, 또 비워 내는 곳에서 유의미하다는 것인데, 하느님은 사람들의 그 비참한 현실 안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죽어 가고,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함께, 늘 머물러 계셨다는 사실에 대한 발견이다. 동방박사들이 움직여 나아간 곳은 보잘 것 없는 집과 힘없는 아기가 있는 곳이었다. 새로울 것도, 놀랄 것도 없는 그 곳에 세상의 모든 왕권이 놓일 수 있었던 건, 하느님이 거기에 오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은 기존 세상의 질서(권력체계, 계급체계 등)를 전복시킬 것이라는 ‘헐리우드 식 영화’에나 나오는 영웅주의를 바탕으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 세상이 알아 주지 않더라도, 세상이 그렇게 바뀌지 않더라도, 또한 세상에 온전히 억눌려 패배주의에 몸서리쳐지더라도, 하느님이 오셨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리고 그 하느님 때문에 세상이 어떻든 나는,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면 된다. 그 발걸음이 동방박사 세 명의 것으로 시작되었으되, 오늘 그리고 내일 우리 신앙의 후손들이 열 배, 백 배, 천 배의 발걸음으로 채워 나가면 될 일이다.

 
 
박병규 신부(요한 보스코)
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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