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우리는 오늘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놓인 한 아기를 기억합니다.(루카 2,6 참조)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떠올립니다.(마태 1,23 참조) 요한 복음은 이를 보다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하느님이 우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같은 처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이 떠오릅니다. 마리아는 잉태한 뒤 유다 산악지방의 한 고을로 찾아가 엘리사벳을 만나고, 거기서 석 달간 머물다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루카 1,39-56 참조) 엘리사벳은 어떤 여인이었나? 평생 아이가 없었던 그녀는 늘그막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잉태한 뒤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4-25) “치욕”, 그녀의 삶을 요약해 주는 말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 치욕을 당하며 살아왔습니다. 예전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지 못한 것이 큰 죄인 양, 그녀는 사람들의 멸시 속에서 구박덩어리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엘리사벳에게, 아기는 엄청난 기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껏 기뻐할 수도 없었습니다. 늙은 여인의 임신은 당혹스러운, 남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잉태 뒤, 그녀가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낸 까닭입니다. 잉태 뒤에도 그녀의 곤경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어땠을까? 그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 하지만 성령의 힘으로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지만,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곤혹스러웠을 겁니다. 당시에는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임신으로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비슷한 처지가 된 것입니다. 아니, 엘리사벳보다 더 곤혹스럽고 위험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모두 ‘아기’ 때문에 곤경에 빠진 여인들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시선을 돌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동병상련!”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만나러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습니다.(루카 1,39)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동병상련이 만들어낸 만남이었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던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나 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인사말을 듣고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칩니다.(루카 1,41) 마리아는 여기에 화답하여,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겸손한 이들, 비천한 이들, 굶주린 이들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찬양합니다.(루카 1,46-55 참조) 아기를 갖지 못해 평생 수모를 당하더니, 이제는 잉태하고도 숨어 지내야 하는 늙은 여인 엘리사벳을 본 마리아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황망한 처지에서, 홀로 자신을 찾아와 인사하는 젊은 여인 마리아를 본 엘리사벳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같은 처지의 두 사람 사이에 서로를 향한 연민이 샘솟았습니다. 동병상련이 두 여인에게 위로와 용기와 희망이 되었습니다. 두 여인의 외침과 찬양은 가슴 벅참에서 터져 나온 환호였습니다.

예수 탄생! 아기 예수를 처음 본 외부 사람은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여관을 찾지 못하고 갓난아기를 포대기에 싸 구유에 뉘었습니다. 목자들은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킵니다. 양쪽 모두 바깥 잠을 자야 하는 같은 처지입니다. 자기들과 같은 처지의 아기가 “구원자, 주 그리스도”라고 알려 주는 천사들의 말은 그들에게 큰 기쁨과 위로였습니다.(루카 2,11-12 참조) 때는 밤, 몸은 피곤했지만, 그 기쁜 소식을 확인하러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발걸음을 서둘렀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아기 예수와 목자들의 만남, 모두 육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육화,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의 일부가 된 사건입니다. 육화는 하느님이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되어, 우리에게 손을 내민 연대의 사건입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인 예수, 사회의 변두리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위로와 용기와 희망이 되었습니다. 예수 또한 함께 하던 사람들에게서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얻었을 겁니다. 예수의 삶, 바로 동병상련의 이야기입니다.

▲ 조현철 신부, 박성율 목사, 박그림 녹색연합 대표 등은 8월 10일 오색케이블카 경로인 오색탐방로에서 대청봉까지 오체투지를 진행했다.(사진 제공 = 녹색연합)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만남은 그 자체로 큰 힘을 지닙니다.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가장 큰 위로는 같은 처지의 사람이 나와 함께 있으며 내게 손을 내밀 때입니다. 실제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이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억울하게 일터에서 쫓겨난 해고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해고노동자들의 연대입니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와서 함께 해주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가장 큰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지난 제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그렇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가장 힘이 되었던 때는 그 누군가와 같은 처지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공정한 판결을 요구하며 함께 했던 평택에서의 ‘삼보일배’ 그리고 대법원 앞에서의 ‘2000배’,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요구하며 함께 했던 서울에서의 ‘오체투지’, 길바닥의 먼지로 시커멓게 된 얼굴을 서로 쳐다보며 웃던 그때를 떠올려 봅니다. 잠시나마, 같은 처지가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와 용기와 희망이 되었던 것, 바로 동병상련의 힘이었습니다. 길바닥을 기어가는 우리를 보며, 길 한 구석에서 무릎을 꿇고 흐느끼던 한 여인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그녀는 동병상련, 그 자체였습니다. 그 기억은 제게 지금도 여전히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지난 8월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사업을 막기 위한 오색-대청의 오체투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의 탐욕으로 설악산이 망가진다는 생각에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오체투지로 설악산을 오르며 이 문제를 세상에 호소하자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할 수 있을까?” 잠시의 망설임은 산에 온몸을 맞대며 올라간다는 끌림에 곧 사라졌습니다. 뜨거운 여름, 설악산에 온몸을 맞대며 올랐던 오체투지는 고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순간순간이 따뜻한 위로의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오체투지로 조금씩 오르다, 설악산 사람 박그림님은 잘려나갈지 모를 나무를 보면 잠시 멈춰 꼭 껴안았습니다. 엎드린 채, 길바닥에 수줍은 듯 피어있는 조그만 꽃과 잠시 눈을 맞추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산과 하나 되는 마음, 자연과 나누는 깊은 교감이 제게 큰 울림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2014년 한국 방문 때, 프란치스코 교종은 한국 천주교회 주교단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 점을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합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려면 무엇을 좀 가지고 있어야 되지 않을까? 교회가 부유해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할 수 있지 않을까? 모두, 유혹입니다. 우리 교회와 사회 현실이 이것이 유혹임을 분명히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교회라야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처지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적 약자의 한 축에 비정규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 비정규노동자들의 쉼터, 소통과 연대의 공간이 될 ‘비정규노동자의 집’을 짓자는 움직임이 생겨났습니다. 비정규노동자들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여름방학 외갓집 같은 공간”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 움직임을 누가 시작했는가? 부당하게 해고된 비정규노동자 자신들입니다.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고 부당한 비정규직 법제도를 철폐하기 위해 길게는 10년씩 길거리에서 풍찬노숙해온 비정규노동자들, 앞으로 자신들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는 다른 비정규노동자들을 위한 ‘비정규노동자의 집’을 짓자고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동병상련입니다. 교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가난해져야만, 가난한 이들의 설움과 아픔을 압니다. 잊지 않게 됩니다. 같은 처지로 내려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동병상련!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익히 행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매년 우리가 기억하고 기리는 하느님의 육화, 아기 예수의 탄생은 어김없이 우리를 밖으로, 아래로, 변두리로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가서,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되라고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육화의 신비, 성탄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세상의 낮은 곳에서 가난한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라는 요청에 기꺼이 응답하는 마음,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 이 하느님의 마음으로,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되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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