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한상봉]

새해가 코앞이다. 선거의 시절이 다가왔고, ‘선거의 여왕’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입김이 벌써부터 다채롭게 향연을 벌이고 있다. 국정원 불법 대선개입, 세월호참사, 최근에는 시위 중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데도 국민의 슬픔과 고통을 ‘나몰랑’하는 대통령이 국회의원 선거에 앞서 ‘진실한 사람’ 타령을 하고 있다 하니, 다행이라 해야 하나, 어이없다 해야 하나, 할 말을 잊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진실한 사람’을 언급한 것은 국무회의 자리였다. 대통령은 국회가 민생을 외면하고 있다면서, “국민을 위해 진실한 사람만이 선택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국민들에게 하소연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1996년 통합민주당 종로구 후보로 나서면서 내건 캐치프레이즈가 ‘진실한 사람 노무현’이었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진실한 사람’이 노무현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번 선거에서 청와대 비서관급 이상의 총선 예상 출마자만 12명이라 하니, 그들이 대통령이 지목한 성골이며 진골인 모양이다. 최경환, 황우여, 김희정, 정종섭, 윤상직 등이겠다.

대통령은 친박, 진박 논쟁이 무성한 가운데 아예 본인이 직접 ‘진실한 사람’의 정의를 이렇게 내린 바 있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 마음이 한결같은 사람”이고 “무엇을 취하고 얻기 위하여 마음을 바꾸지 말고 일편단심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결국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궂은 날이거나 맑은 날이거나 오로지 성군을 위해 ‘한마음’(단심)을 유지하는 사람이겠다. 전두환에게 충성한 장세동 같은 사람이겠다.

현재 사실상 여당 지휘부를 자처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주변에도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그래도 믿을 만한 청와대 측근을 선택하고 있지만, ‘비박’이라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마저 충성심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진실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볼 방법은 당장에 여의치 않다. 아마 2017년 19대 대통령선거에서 ‘불행하게도’ 정권교체가 이뤄진다면, 그때야 ‘진박’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그 뒤 혹시라도 박근혜 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처럼 법정에 서게 된다면 더욱 확연하게 패가 갈릴 것이다. 궁금한 분들은 이참에 정권교체를 이뤄보기 바란다.

문제는 ‘진실한 사람’이 곧 ‘참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통령이 말하는 ‘진실한 사람’이란 거두절미하고 권력자를 따르는 ‘충복’이다. 그러나 참사람은 ‘진리’ 밖에서 오는 충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언자들이 오로지 하느님 앞에서만 복종하기에 한사코 위험을 무릅쓰고 권력자 앞에서 직언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직언의 결과가 예수처럼 십자가 처형이라 해도 진리를 향한 그들의 열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해득실을 따져서 충성을 맹세하는 무리들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마태 5,34-35)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박근혜 대통령의 ‘진실한 사람’ 이야기가 지닌 가장 큰 폐해는 우리의 모국어를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전두환은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한 뒤로 5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정의사회 구현’을 캐치프레이즈로 삼았다. 유신정권만큼 폭압적인 군사정권과 ‘정의구현’은 인연이 없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에서 중요한 기폭제를 제공했던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에서 말하는 ‘정의구현’과 전두환이 선포한 ‘정의구현’은 질적으로 다르다. 가깝게는 국가권력이 제 입맛대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려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시도하면서, 그 이름을 ‘올바른 역사교과서 만들기’라고 하는 것이나, 강줄기에 녹조 라테를 범람케 만든 토건사업을 ‘4대강 살리기’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모국어를 훼손하는 일이고, 언어가 교란되면 사람들은 자기 분열증을 앓는다.

더구나, ‘진실한 사람’이란 말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총선 출마를 포기하는 사람들 입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출마자들이 저마다 ‘내가 진실한 사람’이라고 서로 나서는 상황은 정치 모리배들의 염치 없는 코미디다. 나의 진실함은 남이 보증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진실하다’는 보증을 대통령과 같은 고위층에서 받아 내려는 이들은 이미 진실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진’짜 ‘실’속있는 사람은 되겠다. 그러나 진정한 사람도 아니고 참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진정한 마음을 지닌 참사람은 그 사회의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에게서 평가받아야 한다. 앞다투어 빌라도 총독에게 몰려가 ‘이 자가 모반죄를 저질렀다’면서 동족인 예수를 고발한 자들은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진실한 충복’일지 모른다. 그 고발자들은 하나같이 백성을 옭아매던 유대 고위층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군을 밀고한 친일파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유대 민중에게는 고발당한 예수가 오히려 ‘진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장 힘없는 백성들의 열망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의 신원 자체가 가난한 백성이었다. 그분은 사람도 아닌 짐승의 자리에서 태어나셨고, 이집트에서 이주민으로 어린시절을 보냈고, 목수의 작업대 아래서 자라고, 거처도 없이 떠돌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되는’ 소식을 전했다. 그분이 죽기까지 그리하였다면 그분이야말로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을 향한 일편단심을 지켜낸 ‘진실한 사람’이며, 그래서 ‘참사람’이다. 그래서 해마다 이 계절엔 무력한 아기로 오신 예수를 기억하며, 바닥 백성들의 마음이 설레기 마련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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