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렌즈에 비친 세상 - 박용욱]

1. 스트레스와 공격성

우리에 넣은 실험용 쥐에게 약한 전기 충격을 반복적으로 가한 뒤에 해부를 해 보면 위궤양이 발생하고 부신의 크기가 비대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는 징후다. 같은 조건으로 실험을 하되 바닥에 나무 막대를 넣어 두면 쥐는 막대를 씹으면서 더 잘 버틴다. 부신의 크기가 더 작고 위궤양도 훨씬 덜하다. ‘씹는’ 것이 쥐의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 것이다. 다음으로 이 우리에 두 마리의 쥐를 함께 넣으면 어떨까. 전기 충격으로 스트레스를 받은 두 마리의 쥐는 성격이 포악해져서 계속해서 서로 싸운다. 반복적 전기 충격에다 항상 싸우는 환경이라면 극악의 스트레스 상황일 텐데, 놀랍게도 이 두 마리 쥐의 해부학적 관찰 결과는 예상을 비껴간다. 해부된 쥐는 부신의 크기도 정상일 뿐 아니라 위궤양도 발견되지 않는다. 전기 충격의 스트레스를 서로에게 공격성을 표출함으로써 상쇄시킨 것이다.(러바인과 위너의 쥐 실험)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거부할 수 없는 폭력 앞에서 서로를 공격함으로써 스트레스를 잊는 일종의 생존 전략인 셈이다.

(이미지출처 = commons.wikimedia.org(왼쪽), en.wikipedia.org)

2. 분노하는 인간(Homo Iracundus)으로 살아남기

사회 전체의 공격성과 폭력이 거리낌 없이 표출되는 세태를 목격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스무 살 남짓한 아가씨에게 막말을 쏟아 내는 어르신을 뵈었다.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내가 먼저 자리를 양보했는데도 양보 받은 자리에 앉는 대신, 마치 대역 죄인을 국문하듯 앳된 아가씨를 닦달했다. 이처럼 일상 속에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을 작정하고 달려들어 폭언을 쏟아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간장 종지를 사람 수 대로 안 줬다고 신문 지면을 통해 맹공을 가하는 언론인도 있었고, 600만 감정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이른바 갑질은 이제 새삼스럽지도 않다. 어디 그뿐이랴. 인터넷 세상에서 펼쳐지는 막말의 향연은 날마다 ‘찢어 죽이고’, ‘씨를 말려야’ 할 사람들을 호명한다. 세월호 청문회장 앞에서 고성과 겁박을 서슴지 않았던 단체, 싸워야 할 거악 앞에서는 졸렬하기 그지없다가 당내 갈등을 두고는 맹렬한 기세를 과시하는 정치인들도 있었다. 정의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단체 안에서조차 당혹스러운 폭언과 공격성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 모든 폭력과 공격성에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게 있다면, 엉뚱한 대상에게 자기 스트레스를 풀어대는 화풀이라는 것이다. 스트레스의 근본 원인 앞에서는 무력하다가 만만한 상대가 나타나면 전력을 다해 상대의 무릎을 꿇리려는 이런 화풀이는 실험용 쥐의 생존 전략과 닮아 보인다. 그리고 실험용 쥐의 생존 전략이 인간 사회에 퍼지는 그만큼, 인간 사회는 실험용 쥐의 철창 우리를 닮아가는 것 같다.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이 되는 것을 경계하던 시대가 있었다면, 지금은 괴물의 험상궂은 얼굴을 생존 전략으로 삼는 시대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분노하는 인간의 전성시대다.

3. 자비의 얼굴

자비의 특별 희년을 선포하는 교황 칙서는 “자비의 얼굴”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총 25항의 칙서 가운데 14항에서 25항까지가 구체적인 실천 지침과 관련되어 있다면, 1항에서 13항까지는 ‘왜 자비인가’를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사랑과 자비와 용서에 대한 이 긴 담화를 통해서 교황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시는 듯하다. “하느님께서 정의에만 머무르신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시고 단지 율법 준수만 요구하는 인간과 같게 되실 것입니다. 정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정의만을 요구할 때 결국 정의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용서로 정의를 넘어서십니다.”(“자비의 얼굴”, 21항)

특별 희년의 초입에서 다시 한번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볼 때다. 분노의 얼굴을 자비의 얼굴로 바꾸어 보자. 분노의 얼굴이 애먼 상대에게 화풀이하는 동안, 자비의 얼굴은 하느님 나라를 실현한다.

박용욱 신부 (미카엘)
대구대교구 사제.  포항 효자, 이동 성당 주임을 거쳐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에서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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