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동네 평화 나눠

예닐곱 명의 ‘자매’들이 36가구에 보낼 반찬을 만드는 시간은 분주하고 조금은 흥분된 분위기였다. 12월 15일 화요일 오전, 서울 강북구 솔샘로에 있는 ‘강북 평화의 집’이 일주일에 한 번 주변에 사는 이웃들에게 배달할 반찬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반찬 만드는 봉사를 위해 아침부터 평화의 집에 모인 여성 신자들은 이날 메뉴인 도토리묵 무침과 호박, 양파 지짐을 만들고, 바나나와 함께 포장하는 중이었다.

▲ 강북 평화의 집 봉사자들이 지역 이웃들에게 배달할 반찬을 담고 있다. ⓒ강한 기자

강북 평화의 집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마리토마스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는 이날 모인 신자들의 연령대가 “평균 70대”라고 귀띔해 줬다. 나이 많은 신자들이 활동적이지 않고 보수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통념이었다. 한 수녀는 이들이 반찬 봉사뿐 아니라, 철거민을 위한 현장 미사 등 연대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빈민사목에 힘을 보태고 있으며, 신심활동과 개인적 기도도 정성껏 하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수녀는 서울 강북구 지역에 오래 전부터 철거민 운동이 활발했고, 연대를 중시하는 지역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반찬 준비를 마친 뒤에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는 성경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는 모임이 열렸고, 활기차고 소박한 식탁이 펼쳐졌다. 그러는 사이 반찬 배달 봉사만을 맡고 있는 신자들이 찾아와 마당에 걸려 있는 십자가 앞에서 조용히 기도를 하고 반찬을 가져갔다.

이 봉사자들 모임에서 맏언니인 한선자 씨(체칠리아)와 이희숙 씨(엘리사벳)는 각각 네 집에 반찬을 배달했다. 한선자 씨는 여든 살이 넘은 자신에게 이제 나이가 많으니 봉사활동을 그만하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기쁘게 봉사하며 살고 있고 봉사하는 것을 복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희숙 씨는 남편이 삼양동 선교본당에서 세례 받은 것을 계기로 2004년부터 선교본당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큰 성당과 달리 작고 가정적인 분위기의 공동체가 좋아 10년 넘게 인연이 이어졌다.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씨는 선교본당 식구들 사이에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고 했다. “믿는 사람들이라고 다 마음이 비단결 같이 고운 것은 아니잖아요.” 3년 정도 활동을 쉬기도 했지만, 사람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라는 마음으로 다시 착실히 참여한 것이 2년째라고 한다.

반찬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강북 평화의 집 근처에 사는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나 혼자 사는 노인, 장애인이 많다. 천주교 신자 여부는 관계가 없었다.

▲ 강북 평화의 집 근처 임대 아파트로 반찬배달 봉사를 나선 한선자(오른쪽), 이희숙 씨가 방문한 집에 인기척이 없자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강한 기자

반찬을 받는 이웃들은 이미 여러 번 만나 온 한선자 씨와 이희숙 씨를 반갑게 맞아 주고, 잠시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동갑내기 신자와는 친구 사이 같은 정담이 오갔고, “아들 같은” 장애인은 장난스럽게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혼자 지내거나 병든 자녀와 함께 지내는 노인들은 유독 ‘죽음’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하룻밤 사이에 저를 아버지 품에 안겨 달라”고 기도한다는 노모를 한선자 씨는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기고 살아야 돼. 내 마음대로 되는 세상이 아니에요” 하고 위로했다. 성화와 성모상으로 가득 채운 방을 혼자 지키고 있던 노인도 “사실 요새는 빨리 죽기를 원하거든. 왜냐하면 이제는 더 이상 살 필요가 없어. 자식에게 폐만 주고....” 하고 덤덤하게 말했다.

‘강북 평화의 집’은 미아사거리역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오래되고 경사가 가파른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다. 옆 건물에는 ‘천주교 삼양동 선교본당’, ‘솔샘공동체’라고 쓴 간판이 붙어 있었다. 선교본당은 빈민사목을 목적으로 주로 가이주 단지와 공공임대주택들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으며, 현재 서울에는 5개의 선교본당이 있다. 한 수녀는 ‘평화의 집’은 선교본당을 중심으로 지역민을 위한 활동을 펼치기 위한 공간이라고 말했다. 근처에는 강북 평화의 집에서 독립해 장백의를 만들고 있는 협동조합 ‘솔샘일터’도 있는데, 이를 포함해 선교본당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의 공동체를 ‘솔샘공동체’라고 부르고 있다.

반찬 나눔은 강북 평화의 집이 하는 활동 중 가장 비중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지탱하는 것은 주로 송천동 성당 등 주변 본당 공동체나 수도회의 후원금과 물품 지원이다.

평화의 집에서 반찬 나눔을 계속하는 이유를 묻자 한 마리토마스 수녀는 “봉사자들을 보면 그분들이 행복해서 봉사하시고, 너무 좋아하시고, 그들 사이에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며 그것이 “지탱해 주는 힘”이라고 말했다. 3가지 정도 되는 반찬으로 많은 양이 아니지만 봉사자들이 정성을 다해 준비한 선물을 가져가는 듯하고, 반찬을 받는 이들도 그런 마음으로 받고 있다는 것이 한 수녀의 체감이다. 함께 이곳에서 활동하는 최 아뽈리나 수녀는 “무료 급식이라는 용어는 안 쓰려고 한다”며 “도움이 필요해서 드린다고 하더라도 동정이나 갑을 관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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