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한상봉]

“어느 날 갑자기 조계사에 불덩어리가 떨어졌어요. 너무나 뜨거워 다루기 힘들었어요. 그 불덩어리는 안에 들어와 식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불을 불러왔어요.”

조계종 화쟁위원회 도법스님이 조계사에 몸을 의탁했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두고 한 말이다. 경찰은 공권력을 투입하겠노라 조계사를 압박하고, 조계사와 조계종은 성소침탈에 반대하며, 한편으로는 한상균 위원장에 자진출두하라고 사실상 ‘도덕적으로’ 압박했다. 조계사의 곤혹스러운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지만, 경찰과 한상균 위원장 사이에서 종교란 무릇 무력한 이들의 피난처 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한상균 위원장은 타인을 해치고 절간에 숨어들어 온 범죄자가 아니다. 자신의 몸통을 인질 삼아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기 위해 조계사에서나마 공동선 차원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의인이다. 한상균 위원장의 말마따나, 그는 살인범도 파렴치범도, 강도범도, 폭동을 일으킨 사람도 아니다. 그는 해고노동자이며, 해고가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에 ‘쉬운 해고’를 가능케 할 노동법 개악에 반대했던 사람이다.

도법 스님의 <한겨레>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그런 한상균 위원장을 도법 스님은 “우리 사회의 불신과 분노, 통탄과 절망을 품고 이리저리 충돌하다 조계사로 온” 불덩어리였고, “이 불이 내내 식지 않은 채 다른 불을 불러 왔다”는 것이고, 결국 이 뜨거운 불덩어리를 조계사는 조계사 밖에서 먹이를 포획하기 위해 진치고 있는 경찰 입 앞에 토해 낸 격이다. 도법 스님은 “세상은 함께 살도록 돼 있고, 함께 살아가려면 편 갈라 싸우는 승부가 아니라 만나서 대화를 통해 지혜를 나눠야 한다”고 했지만, 대화는 평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민중총궐기에 나선 이들을 ‘IS’에 비유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고압적인 경찰 앞에서, 이들에게 범죄자 취급을 받는 한상균 위원장이, 그것도 ‘경찰서 안’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말인가?

▲ 12월 10일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자진출두를 앞두고 경찰이 조계사를 에워싸고 통행을 막은 가운데 몇몇 시민이 한 위원장의 기자회견을 스마트폰으로 보고 있다. ⓒ강한 기자

조계사에 불이 옮겨 붙기 전에 빨리 토해내야 할 불덩어리가 한상균 위원장이었다면, 아직 식지 않은 불덩어리를 조계사 문밖으로 내어놓는 행위는 ‘자비심’과 상관이 없다. 한상균 위원장이 자신의 절망과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여전히 뜨거운 것을 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한 위원장은 20일 남짓 조계사에 있었으나, 이 한 사람의 가슴 속에서 이글거리는 불덩어리를 다스리지 못한 스님들의 부족한 공력을 오히려 탓하고 성찰해야 마땅하다. 오히려 한상균 위원장은 경찰에 연행되면서 “노동법 개정저지를 위해 경찰에 가서도 단식을 이어 가고 108배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자신의 안위보다 세상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이 관음보살의 마음이다.

불교에서는 번뇌와 고통이 가득한 속세를 ‘불타는 집’, 화택이라고 하지만, 이번 사태로 드러난 것은 조계사 자체도 정토가 아닌 화택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상균 위원장이 은신하고 있는 동안, 한 위원장을 경찰에 넘기려고 관음전으로 달려들던 조계사 신도회는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이나 다른 보수우익단체처럼 격한 발언을 쏟아 냈다. 한 위원장이 은신한 장소가 ‘관음전’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뿐이다. 그곳에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한다는 관음보살은 없었다. 한걸음 더 나가서 조계사 주지 지현 스님은 “제2의 한상균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조계사 차원의 매뉴얼을 만들겠다”고 <동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번처럼 충분한 검토 없이 누군가 사찰에 들어오고, 눌러앉고, 정치투쟁을 벌이면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충분히 사전에 조율된 사람만 조계사에 은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마 조계사도 명동성당 짝이 날 것이라 예상된다.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라고 불릴만큼 6월 민주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성당 들머리에는 철거민들과 해고노동자들, 의탁할 데 없는 이들이 천막을 치고 생존권 투쟁을 벌이곤 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성당 사목위원들과 사무실은 천막을 부수고 이들을 밀어내곤 했다. 급기야 명동성당 재개발 사업이 시작되면서 이제는 들머리 자체가 사라졌다. 이제 ‘호소할 데 없는’ 이들 가운데 아무도 명동성당 쪽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과 상관없이 명동성당은 이미 가난한 이들과 전혀 상관없는 공간이 되었다. 그들만의 고상한 일상이 ‘하느님 이름으로’ 고요하게 거행되는 게토가 되었다. 그들이 스스로 세상의 고통 받는 이들에게서 문을 닫아걸었기 때문이다. 이제 조계사 문이 닫히고, 이 땅의 많은 노동자들과 가련한 인생들은 또 다른 곳을 찾아 이 겨울에 헤맬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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