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열의 떼제 일기]

“ 떼제로 가고 싶어요”

의사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드니(Denis) 수사는 그렇게 말했다.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살던 그는, 올 여름 동안 떼제에서 지내고 돌아간 뒤에 급격히 건강이 나빠졌다. 원인을 밝히지 못한 현지 의사의 권유로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공항에서 바로 병원으로 갔다. 며칠간 검진 결과 뇌종양이 발견되었고, 고령에다 워낙 몸이 쇠약해진 탓에 의료진은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된드니 수사는 병원이 아니라 떼제에서 삶을 마지막 순간을 보내기로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우물 옆 큰 방에 그를 맞을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마당에 핀 예쁜 꽃을 화병에 꽂아 탁자에 올려 두었고, 나이로비의 빈민촌 마타레 계곡의 움막에서 로제 수사가 어린이들에 둘러싸여 찍은 사진도 확대해서 갖다 놓았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의사와 간호사와 함께 구급차에 실려 온 그는, 한 달여 전에 비해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물도 한 모금 삼키지 못하는 것은 물론, 왼팔이 마비되었고 더 이상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신은 뚜렷했고 오른손으로 필담을 할 수 있었다. 드니 수사는 지상에서 자신의 마지막 거처가 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너무나 만족해했다. 도와 준 젊은 독일 수사에게는 “여기가 독일이라면, 이럴 때 맥주 한 잔 같이 하는 건데....” 하고 썼다. 그는 형제들이 자기를 찾아오기를 바랐다.

▲ 케냐에서 지낼 당시의 드니 수사(안경 쓴 사람).(사진 제공 = 신한열)

동네에 사는 간호사가 매일 다녀갔고 우리 형제들은 번갈아 가면서 그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루 이틀 그리고 한 주, 두 주가 흘렀다. 상태가 좋을 때는 “혹시나...” 하는 기대가 생기다가 다시 기력이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형제와 누이 등 가족들이 다녀갔고 죽마고우 친구 부부도 찾아왔다. 내가 드니 형님의 방에 가면 누군가 이미 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소통하려고 애썼다. 더 이상 글씨조차 쓸 수 없게 되자 우리는 커다란 마분지에 글자판을 새겨 손가락으로 가리키도록 했다.

“진정한 순례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드니 수사는 공동체의 한 복판에서, 보름 하고 며칠을 더 보냈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 그는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 온 친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싶어했다. 글자판의 알파벳을 한자 한자 짚어가면서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요 며칠 동안 받은 커다란 우정에 감격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답장을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제 희망과 신뢰의 먼 길이, 진정한 순례가 시작됩니다. 다시 한번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사진 제공 = 신한열)
공동체 전체가 대림절을 앞두고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진 오후에 그는 자신이 들을 수 있도록 방에 스피커를 설치해 달라고 했다. 병석에서 그날 저녁기도까지 듣고 잠이 든 그는, 다음 날 아침 깨어나지 않았다.

여든 한 살에 선종한 드니 형님은 스위스 로잔 출신으로 건축가였다. 우리가 매일 세 차례 손님들과 함께 기도하는 떼제의 “화해의 교회”도 그가 설계했다. 그는 오랫동안 아프리카의 케냐와 세네갈에 살면서 여러 교회와 수도원 건물을 지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종이 방문한 빈민촌 캉게미의 “노동자 성 요셉 성당”도 그가 설계했다. 선종하기 직전에 그는, 자신이 살았던 캉게미를 프란치스코 교종이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기뻐했다.

오랫동안 케냐와 세네갈의 빈민촌에서 살면서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학교나 병원을 세우고 운영하지도 않았고 정규적인 사목 활동을 한 적도 없다. 그는 아이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해 주고, 몇몇 가정을 돕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빈곤과 불의의 현실에 자신이 해결책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슬픈 깨달음이 그에게 있었다. 교육과 자선을 포함해서 어떤 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가난한 이들 속에서 그들과 어울려 함께 사는 것임을 그는 직관적으로 알았고 그렇게 했다.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그가 처음 정착했던 곳은 “마타레 계곡”이었다. 그곳은 당시 케냐의 가장 큰 빈민촌이었다. 로제 수사가 드니를 비롯한 몇몇 형제들을 데리고 그곳에서 지내려고 하자 주임 사제는 “위험하고 서양 사람이 살 곳이 못된다”며 극구 반대했다. 수사들이 그곳에 움막 한 채를 빌려 머물기 시작하자 그는 권투 선수인 신자 두 사람을 보내기까지 했다. 화장실도 전기도 수도도 없는 그곳에서 한동안 지내고 떠나면서 로제 수사는 드니에게 계속 남도록 부탁했다. 거의 맨손으로, 드니 수사는 여러 해 동안 그곳에 살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개발 이익을 노린 세력이 연루되었음직한 화재가 몇 차례 났고, 수사들은 결국 마타레 계곡을 떠나 캉게미로 옮겨 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

드니 수사의 아버지는 과학교사로 이성주의자였다. 아들의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버지가 그의 독신 수도 공동체 생활을 이해하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선배 수사들에 의하면 드니의 가족은 떼제에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들으니 드니 수사가 나이로비의 빈민촌에 살 때 아버지가 그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아들에게는 더없이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신앙이 없던 아버지는 가난한 이들 가운데 사는 아들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 가족에게조차 신앙은, 그리고 수도 성소는 말로써 설명할 수 없고 오직 삶으로 보여 줄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당장 혹은 늘 이해되지는 않는 법이다.

장례식에는 가족 다섯명이 참석했다. 최근에 병문안을 와서 우리를 만난 적이 있었기에 다행히 서먹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드니 수사는 마을 교회 앞 묘지에 묻혔다. 이미 세 수사가 잠들어 있는 자리에 그의 관이 내려졌다. 이미 있던 나무 십자가에 그의 이름이 추가되었다. 묘지가 넓지 않아 우리 형제들은 죽어서도 공동생활이다....

▲ 가장 왼쪽에 드니 수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사진 제공 = 신한열)

새로 생긴 수도공동체는 구성원 가운데 누군가 세상을 떠날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형제들이 선종할 때마다 공동체가 더 굳건해지는 느낌이다.

드니 수사는 우리 가운데서 보낸 마지막 몇 주 동안, 형제들 모두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온전히 남에게 의존해서 지낸 그였지만 눈빛만으로, 존재 그 자체로 우리에게 소중한 선물이 되었다. 그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우리는 마음 가득 감사하며 하느님을 찬양했다.

지상의 여정을 마치고 “희망과 신뢰의 진정한 순례 길”을 떠난 드니 형님. 그를 보내며 맞이한 대림절,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의 열망은 더욱 더 뜨거워졌다.

 
 
신한열 수사
떼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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