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12월 6일(대림 제2주일) 루카 3,1-6

오늘 복음은 요한 세례자의 출현을 알립니다. 루카 복음서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느 시점에 일어난 일인지를 정확하게 언급합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치세 15년이고, 본시오 빌라도가 로마 총독으로 유대아를 통치할 때입니다. 당시 팔레스티나의 영주 세 사람과 대사제들의 이름도 밝힙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릴 때도 당시의 로마 황제와 총독의 이름을 정확히 언급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나의 신화에 그 기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과정을 거쳐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 신앙은 그 시대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인류역사 안에 그 발생과정이 확인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들은 요한 세례자가 요르단 강 부근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고 말합니다. 그 시대 팔레스티나에는 여러 형태의 세례 운동이 있었습니다. 율법과 성전 의례에 대한 유대교 당국의 요구는 엄했습니다. 사람이 그 요구들을 온전히 수행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진 절망감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 시대의 세례는 흐르는 강물에 사람의 몸을 잠기게 하여 죄를 씻는 의례였습니다. 그것은 유대교 실세인 사제와 율사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민중 안에서 일어난 일종의 신앙부흥 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은 죄의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의례였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그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사람들 중 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세례는 다른 세례 운동가들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세례 운동가들이 단순히 죄를 씻는 의례로 세례를 행했지만, 요한은 세례를 주면서 회개, 곧 삶의 전환을 요구하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일생에 단 한 번 받는 의례였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가르치기 전에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복음서들이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은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운동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발족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보았습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은 사실을 말하면서 요한 세례자를 정확히 자리매김해야 했습니다. 당시에 요한의 제자들도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베푼 요한이 세례를 받은 예수보다 더 훌륭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요한이라고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서(40,3-5)를 인용하여 그 사실을 설명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예수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여 준 주님이고 요한은 그분의 길을 준비한 인물이라는 해석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회개는 어려운 절차가 아닙니다. 자기 삶을 바꾸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던 사람이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요한은 세례를 주면서 그 결심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였습니다.

▲ '되찾은 아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70)

유대교 지도자들은 모세로부터 비롯된 신앙을 왜곡하였습니다. 율사들은 율법 준수를 강요한 나머지, 사람들이 율법 준수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하였습니다. 사제들은 성전에 바칠 것만 강조한 나머지, 사람들이 제물 봉헌에만 마음을 쓰고, 하느님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하느님은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그 죄에 대한 대가로 그들에게 벌을 주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이 있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게 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그 함께 계심을 사는 데에 필요한 생활지침이었습니다. 제물 봉헌은 사람이 노동하여 얻은 것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서 하느님의 시선이 그 위에 내려오게 하여, 그분의 시선으로 자기가 얻은 산물을 보는 상징적 의례였습니다. 인간이 자기가 얻은 것을 자기 한 사람만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그것을 보고 처리하게 하는 상징적 의례였습니다. 얻은 것이 은혜로우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도 은혜로운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사와 사제들은 지키고 바칠 것만 강조하다가 율법과 제물 봉헌의 참뜻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벌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 안에 발생한 세례 운동은 그런 왜곡된 신앙으로 말미암은 폐해에서 벗어나겠다는 민중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단어에는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포함된 아버지는 자녀에게 은혜로운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땅에서 우리가 실천하며 살겠다는 기도입니다. 은혜로움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시고, 사랑하고, 용서하신다는 말은 그분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도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어떤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녀 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생명을 이어 받아 이 세상에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말합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하느님을 빙자하여 의인과 죄인을 갈라놓고, 사람을 차별하던 높은 사람들은 낮아지고, 그들로부터 무시당하던 낮은 골짜기, 곧 죄인들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으로 메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 은혜로우심을 실천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이웃에게 은혜로운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저 멀리 내세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람들에게 은혜로울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마르 10,43)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이웃에게 은혜로운 사람이 되어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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