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20

▲ 윤지충(바오로, 1759-1791)가 신주를 불사르자 종친들이 나무라고 있다.

신주를 불사른 윤지충, 권상연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온지 6년째 되던 1791년에 전라도 진산지방(오늘날의 충남 금산군 진산면)의 양반이었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돌아가신 어머니의 신주를 불사르는 일이 있었다. 신주는 한낫 나무토막일뿐 돌아가신 분의 영혼이 그 안에 머물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들은 ‘효’를 인륜의 기본으로 하는 사회에서 패륜아로 몰리면서 체포되었고 심문을 받았다. 그 때 윤지충은 이렇게 답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천주교를 신봉함으로써 제 양반 칭호를 박탈당해야 한다고 해도, 저는 천주께 죄를 짓기는 원치 않습니다...죽은 이들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모시지 않으면서, 집안에서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는 것은 결코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 듯 합니다.” 

이들은 전주로 압송되어 풍남문 밖에서 참수당했다. 이것을 ‘진산사건’이라 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는 임금도 아비도 몰라보는 무군무부의 종교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결국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1801년 신유박해)로 이어지는 단초로 작용했다. 

황사영 백서 사건

▲황사영 백서


그 뒤 조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공하다 할만한 사건이 또 벌어진다. 역시 양반 교인이었던 황사영이 신유박해 당시 충북 제천 근처에 피신해 있으면서, 조선 천주교회를 구하고 조선을 천주교 국가로 만들 요량으로 북경의 프랑스인 주교 구베아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써보내려 시도한 일이 있는데, 편지의 내용 중 일부는 이렇다: 

“이 나라의 병력은 본래 보잘 것 없어서 모든 나라 중에 맨 끝입니다. 게다가 이제 태평한 세월 200여 년을 계속해왔으므로 백성들은 군대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위에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로는 어진 신하가 없어서 자칫 불행한 일이 있기만 하면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배 수백 척과 군인 5,6만 명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글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사람 서너 명을 데리고 와서 이 나라 해변에 이르러 글을 왕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우리들은 서양 전교대인데, 자녀나 재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교황의 명령을 받고 이 지역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온 것이니, 귀국에서 이 한가지 전교하는 일만 허락한다면 우리는 더 바라는 것이 없다.

......그렇지만 천주의 사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곧 천주를 대신하여 징계와 벌을 줄 것이고, 죽는 한이 있어도 돌아서지 않겠다. 왕은 이 요구를 들어주어 온 나라가 벌받는 것을 면할 것인가? 아니면 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아 나라 전체를 잃을 것인가? 왕은 이것을 잘 택하라’ 라고 말하면 좋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서양 제국의 무력을 이용해 조선에서의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무기와 군대를 동원해 위협하면 조선에서 지레 겁을 먹고 그리스도교의 선교를 허용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교회 입장에서는 신앙적 양심의 실천이지만 조선 편에서는 천인공노할 매국적 행위로 보기에 충분한 이 사건을 두고 설왕설래하기도 했지만, 어찌되었든 다행인지 불행인지 황사영은 이 편지를 중국에 보내기 전에 발각되어 처참하게 참수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의 여파로 교인 300명 정도가 처형당하거나 옥사했으며, 교회는 산간지역으로 흩어지는 등 표면상으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아레오파고의 설교

바오로 사도
그리스도교를 흥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한 일이 도리어 그리스도교를 수면 아래로 내려가게 만든 꼴이 된 셈이다. 이러한 ‘진산사건’과 ‘황사영 백서 사건’은 오늘날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성서에 나오는 바울로의 아레오파고 설교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 

바울로는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전한다는 이유로 아테네 시민들에게 기소되어 아레오파고 법정에 선 일이 있었다. 법정에 선 김에 바울로는 자신의 입장을 한 껏 증언할 수 있었는데, 내용인즉 다음과 같았다.(사도 17, 22-27) 

“아테네 시민 여러분, 제가 보기에 여러분은 여러 모로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아테네 시를 돌아다니며 여러분이 예배하는 곳을 살펴보았더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 온 그분을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사람이 만든 신전에서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하느님에게는 사람 손으로 채워드려야 할만큼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 위에서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이 살아갈 시대와 영토를 미리 정해주셨습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사도 17,22-27) 

바울로는 그리스에서 선교하기 위해 그리스인들이 믿던 신들과 자신이 믿는 하느님을 연결지었다. 하느님이 한 조상에게서 온 인류를 내셨으니 그리스 아테네에 사는 이들도 그 하느님에게서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받아 사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바울로에게는 그리스인의 신심 역시 그것이 무엇이든 어떻게 표현되든 인류의 기원이 되는 한 분 하느님을 찾아가는 흔적이었다. 그의 설교가 예수의 부활과 심판, 그리스인에 대한 회개에의 요청으로 마무리되기는 하지만,(30-31), 바울로의 선교적 자세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인의 신심을 그저 허상이나 오류가 아닌, 지적 호기심 내지 종교적 신심의 증거로 보았다는 사실이다.

알지 못하는 신 앞에서의 겸손함

지적 호기심과 종교성으로 넘처나던(21) 그리스인의 ‘알지 못하는 신’을 자신이 믿는 하느님과 연결짓고 어디서든 언제든 늘 사람들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을 더듬어 찾는 행위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어떻게 보실지>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큰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운 사건과 그이를 참수한 사건, 신앙의 자유와 조선의 천주교화를 위해 중국의 프랑스인 주교에게 편지를 쓰고 그것을 천인공노할 매국적 행위로 판단해 편지의 주인공을 처형시킨 사건 등은 왜 벌어지게 되었는지, 근본 원인을 다시 묻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분명하고도 중요한 것은 바울로가 그리스 아테네의 다신교적 세계관에서 오는 문화 충격을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대립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지은 신전에 살지 않는 초월적 하느님을 특정 형상 안에 가두려는 행위를 경계하면서도,(29) 하느님은 그곳에서마저 가까이 계신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쩌다 이러한 선교 자세는 사라지고 그리스도교와 비그리스도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대립적 선교자세가 득세하게 되었을까. 오늘날 이러한 자세는 점차 극복되어가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와 비그리스도교를 칼같이 나누려 하거나 나눌 수 있다고 보는 자세가 여전히 주류인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인의 ‘알지 못하는 신’과 그에 대한 바울로의 입장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어찌 보면 그리스인이 바치던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은 신을 다 아는 양 특정 틀 안에 가두고 독점하는 자신만만한 자세보다 더 겸손하고 종교적인 자세이기도 하다. “하느님에게는 사람 손으로 채워드려야 할 만큼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치장해놓은 것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착각을 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하느님은 사람이 만든 신전에서는 살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고 하느님을 신전 안에 가두는 일을 자처하거나, 자신이 만든 신전만 신전인냥, 다른 신전을 거부하는 배타적 자세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도 돌아볼 일이다. 하느님은 여전히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는 겸손함이 여전히 필요한 상황이다. 김경재 교수의 표현마따나, “알지 못하는 신 앞에서의 겸손함”을 여전히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신’의 흔적 

 한국 교회사 초기에 있었던 엄청난 죽음과 죽임의 소용돌이는 불가피했던 것일까. 윤지충은 어머지의 신주를 불태우는 방식으로만 자신의 신앙을 표명해야만 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는 한편 가상하고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바울로가 그랬던 것처럼, 돌아가신 어머니의 신주에서도 ‘알지 못하는 신’의 흔적을 보는 그런 선교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일까.

서양의 군대를 동원해 자신의 조국 전체를 위협해주기를 바랐던 황사영을 처형한 조선의 입장은 그르기만 했던 것일까. 더 나아가 조상과 부모에 대한 ‘효’의 전통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 정부 안에는 하느님이 없었을까. 교회가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만 한 일일까.

이천년전 바울로식의 선교가 이백년전 한국에서도 이루어졌다면 오늘 한국 교회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물론 이러한 가정적 질문 자체가 우문이 아닐 수 없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선교적 자세와 관련하자면 묻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할 말이 많지만,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기회에 정리해보기로 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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