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시기, 인류 구원 위해 사람이 되어 오시는 구세주를 깨어 기다리는 ‘때’다. 복음서를 통해 우리는 구세주가 구유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는 이들은 불행하고,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외쳤던 전복의 복음사가 루카 덕분이다. 루카는 그 시대 로마제국의 황제로 신의 아들이자 평화의 왕으로 숭배 받았던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에 대비시켜, 유대 땅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고을 베들레헴에서 일어났던 하느님의 아들 아기 예수의 탄생사를 그린다. 루카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한 팍스로마나가 참된 평화가 아니라 팍스크리스투스야말로 참된 평화임을 웅변하면서 구원의 참된 길을 드러내고자 한다.

장일담의 추억, 전태일과의 만남

김지하가 담시 형태의 옥중 메모 ‘장일담’에서 외친 것도 그것이었다. 장일담은 백정 아비와 성매매 여성 어미에게서 태어난 도둑이었지만, 어느 날 깨치고 임꺽정 같은 의적이 되어 혁명을 꾀한다. 장일담은 ‘해동극락교’를 선포하고 서울을 향해 깡통을 들고 “밥이 하늘이다” 외치며 무리지어 진군했지만 결국 반공법 국가보안법 내란죄로 목이 잘린다. 그렇게 죽은 장일담이 사흘 만에 부활해 예수처럼 억압받는 사람들의 구세주가 된다는 것이 ‘장일담’ 줄거리다.

나는 그 ‘장일담’을 1980년대 초에 만났었다. 그러다 몇 년 뒤 철야피정에 갔다가 서재에 꽂혀있던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당시엔 조영래 변호사가 필자인 줄 몰랐다)을 우연히 발견하고 읽게 되었다. 피정에 참여하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그 책이 밤새 나를 붙들었다. 전태일의 얼굴에 곧장 장일담이 겹치면서, 신화나 민담으로나 전해져 오고 문학작품에서만 그려질 줄 알았던 그런 ‘사람’이 그리 멀지 않은 동시대에 그렇게 뜨겁게 살았음을 알고 전율했다. 그토록 힘든 현실에서 어떻게 그런 삶이 가능했을까 감동을 지나 감탄을 거듭하며 책장을 넘겼다.

▲ 전태일이 다녔던 청옥고등공민학교(현 명덕초등학교)에서 친동생 전태삼 씨(앞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와 함께.(사진 제공 = 정중규)

전태일은 삶의 아들이었다

하긴 인류 구원 위해 오신 하느님의 아들조차 ‘저 사람은 기껏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하며 선입관에 사로잡힌 종교권력에 의해 외면당했던 것 아닌가. 하지만 현실은 참으로 진실되게 호흡한다면 그 어떤 위대한 스승보다 나은 것, 그날 밤새 그의 일기장을 읽으며 현실이 지닌 경이로움에 몸서리쳤다. 이데올로기조차 삶 속에서 몸으로 깨쳤던 체험의 산물임을 왜 잊었던가. 장일담은 충분히 현실성을 띤다고, 예수의 족보도 그러하다고, 전태일의 탄생은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전태일은 삶의 아들이었다.

30년 전 그날의 충격은 한 컷으로 스캔되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30년 뒤 지난 11월 21일, 대구 계산오거리 교통섬에 있는 생가터에서 전태일 공원 선포식을 거행하면서 그 장면이 반추되듯 떠올랐다. 그날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 씨와 함께 어린 전태일이 다녔던 청옥고등공민학교에서 생가터까지 함께 거닐면서 30년 전의 확신을 확인받았다. 그것은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었고, 그냥 스토리가 아니라 리얼스토리였다.

개벽이 전복, 전복이 개벽

한국전쟁 전후의 우리네 삶이 그러했겠지만, 전태일의 어린 시절은 참담했다. 그토록 배움에 목말랐지만 늘 학업은 중단되었고, 그토록 살아보려 온 가족이 대구 부산 서울을 오가며 몸부림쳤지만 번번이 부도 만나고 사기당하고 화마가 덮치고 철거반에 쫓기며 전태일의 집은 7번 헐렸고 8번 다시 지어졌다. 모든 고통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지는 않을 것인데, 놀라운 점은 그런 삶 속에서 전태일은 끝내는 불꽃으로 타오를 불씨를 키워 나갔다는 것이다.

▲ 전태일의 장례식에서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이소선.(사진 제공 = 전태일재단)
그런데 그 불씨의 불씨를 그의 어머니에게서 발견하고 감동을 받는다. 1970년 전태일 열사 장례식장에서 아들의 영정 사진을 안고 오열하는 이소선 어머니의 사진은 그 자체가 ‘고통의 성모’ 성화였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인들 그러할까. 수난의 길에 동참해 한 길을 걸어가는 2000년 전 예수와 마리아 그 모자를 거기에서 본 듯 했다. 전태일의 꿈은 바로 어머니에게서 유전된 것임은 아들의 사후, 아들의 꿈을 이어 받아 노동자의 어머니로 평생을 다한 그 삶으로 드러난다. 이 세상의 모든 아들은 모두 어머니의 아들이지만 꿈으로 맺어진 모자간만큼 위대할까. 왜 미토콘드리아는 모계로만 유전되며, 예수께서 아버지가 없이 어머니만으로 태어나셨다는 동정녀 탄생 이야기의 메시지는 바로 그런 것이다.

도둑질을 하다 잡혀 감옥에 갇혀 있다 탈옥한 장일담은 경찰에 쫓기다 집창촌에 숨어드는데 그곳에서 성병과 결핵과 정신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성매매 여성이 건강한 아이를 낳는 것을 보고 “오, 나의 어머니여!” “발바닥이 하늘이다!” “하느님은 당신들의 썩은 자궁 속에 있다! 하느님은 밑바닥에 있다!”고 외친다. 천지개벽이 전복이요, 전복이 천지개벽인 것이다. 구원이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늘 높은 곳에서의 영광이 땅에서는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평화가 되는 이유다.

자비의 특별 희년 맞아 교회의 모든 문들, 가장 낮은 곳으로 활짝 열려야

이번 대림시기는 그 한가운데에서 자비의 특별 희년 시작된다는 점이 특별하다. 없는 자들을 더욱 힘없게 만들고, 아픈 사람들을 더욱 아프게 만들고, 소외된 자들을 더욱 소외시키는, 곧 가진 자는 우대하고 가난한 자는 홀대하는 부우빈홀(富優貧忽)의 정책 기조 아래, 서민들의 삶의 질은 급전직하 추락하고 있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대거 발생하는 가난한 이들로 인해 이 사회엔 살아도 죽은 것 같은 목숨들이 너무 많다. 우리의 희망이 죽어 가는 그들을 다시 살리는 데서 시작됨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30년 전에 일군 민주화가 위기를 만나 있다. YS 서거를 87체제의 종결로 의미 부여하지만, 수구세력의 영구집권 토대를 마련하려고 박근혜 정권에 의해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전방위로 진행되고 있는 저강도 쿠데타, 반민주적 역사 후퇴 한가운데에서 맞은 YS 서거는 오히려 민주화운동 시대를 다시 불러내야 함을 죽음으로 일깨워 주고 있는 듯하다. 2017년 수구세력의 정권재창출 시도를 저지하지 못하면, 차기 5년은 그냥 5년이 아니고 영구집권의 기나긴 터널로 들어가는 입구(hellgate)가 될 가능성이 높은 까닭이다.

2000년 전 로마제국 치하의 유대 땅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권력의 채찍은 낮은 곳부터 내리친다. 낮은 곳으로부터 구원이 시작된다함은 전복의 채찍을 쥔 하늘에 계신 그분의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반동적 채찍질 때문. 그렇다면 교회의 모든 문들도 자비의 특별 희년을 맞아 당연히 가장 낮은 곳으로 열려 있어야 할 것이다. 거기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을 아기, 구세주의 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 때 구원의 빛이 베들레헴의 별처럼 모두를 이끌 것이다.

 
 

정중규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이자 정책네트워크 내일 장애인행복포럼 대표로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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