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한상봉]

어제 서울에는 첫눈이 내리고, 이제 겨울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소설가 서영은이 쓴 산문에 실린 눈에 관한 이야기도 따라와 앉는다. 묵은 선술집에서 사내 몇이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자리가 파장이 날 무렵에 한 사내가 바깥으로 난 창을 내다보더니 이내 한 마디 한다. “야, 눈이 오네.” 일어서려던 엉덩이를 다시 붙이고 흰 눈빛에 젖어 다시 소주를 시키는 분위기다. 이런 날 한잔 더 해야 한다는 거다. 서영은은 이런 이야기를 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눈이 온다. 다시 살아 봐야겠다.” 도대체 흰눈이 내리는 것과 생존의 의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대부분 ‘헬조선’을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삶이란 고달프고 고단한 일이다. 삶은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내야 한다는 안간힘이 느껴진다. 파란만장한 생애의 갈피를 접고 세상을 하얗게 덮어 가는 눈발은 ‘삶의 평등성’을 기억하게 만든다.

몇 해 전에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영묘원’이라는 공동묘지에 간 적이 있다. 원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 안치하거나 ‘평장’을 한다. 봉분을 세우지 않는다는 뜻인데, 묘지 입구에 이런 비석이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죽은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 마치 톨스토이가 우화집에서 “사람은 땅이 얼마나 필요할까?” 물으며, 결국 죽어서 누울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게 인생이라고 답한 것이 떠오른다. 사람이 큰 대자로 누웠을 때 공간이 한 평이라는데, 아마 그 정도 땅을 얻자고 평생을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익산 원불교 영묘원.(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sukhe99/220101974722)

그래도 삶이 의미가 있다면, 다른 이유가 있겠지, 생각한다. 첫눈을 바라보며 ‘첫마음’을 기억할 때 사람들은 다시 힘을 얻는 것일가? 자녀들 때문에 마음고생 많았던 부모도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얻은 기쁨으로 아이들을 다시 끌어안는다. 부부도 첫사랑 때문에 살고, 신앙인들은 그분을 체험했던 그 순간에 기대서 지금 이 순간을 영원처럼 살아간다. 어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있던 날이기도 했다. 분향소에는 발길이 뜸했다지만, 신문방송에선 김영삼 대통령의 민주화 열정에 대해 연일 보도했다. 이런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장면은 문익환 목사님이 돌아가셨던 1994년 1월 어느 날이 기억난다. 서울 대학로에서 영결식이 있었고, 이날 눈이 하염없이 내렸다. 젊은 날 어른처럼 버티고 계셨던 많은 분들이 이미 돌아가셨다. 백기완 선생님 정도가 지병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우리 곁을 지키고 계시니, 그나마 다행이다.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는 모진 목숨만 살아남고 착한 눈빛을 가진 분들도 모두 돌아가셨다. 김대중 대통령도 노무현 대통령을 따라서 저승으로 거처를 옮기셨고,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대통령은 아직도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 빈소에 찾아왔던 전두환 대통령을 보면서, 늦은 겨울에도 아직 목을 부러뜨리지 않고 나무에 붙어 있는 마른 가지를 타박하던 기형도 시인이 생각난다. 생각해 보면, 문득 내가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개신교 신자가 3명, 천주교 신자가 3명이다. 그런데 개신교 장로 대통령은 하나같이 독재정권과 어떤 점에서 연루된 인물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이명박 대통령도 볼썽사나운 보수 개신교인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에서 의미있는 역할을 했지만 3당합당을 통해 여당 후보로 나와 대통령에 당선된 분이기에 뒷끝이 씁쓸하다. 그런데 민주당 정권의 장면 박사나, 장면 박사 때문에 천주교에 입교했다는 김대중 대통령, 송기인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지만 천주교인임을 자처하지 않았던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저런 이유로 천주교와 인연이 각별한 분이다. 그리고 세 분 모두 야성을 지닌 분이라는 점에서 다행이라 여긴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은 자는 평등하다. 그가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든, 민주화 투사였든, 아니면 개같이 살다가 닭같이 죽었든 죽음은 누구에게나 말을 변명도 자랑도 허락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은 이들의 슬픔’이며, ‘살아남은 이들의 기쁨’이다. 어떤 이들은 죽어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죽어서도 살아남은 이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사랑과 존경 안에 머문다. 예수의 부활이란 어쩌면 이처럼 사랑받을 만한 죽음을 간직한 이들의 가슴 속에서 언제든 발화하는 것이지 모른다. 그 뜨거운 발화를 진행시키시는 분이 성령이라 믿는 것이 신앙인지도 모른다.

예전에 “생활 속에서 드리는 나의 기도”라는 기도서를 ‘감히’ 지은 적이 있다. 그 첫 글이 ‘아침에 눈을 뜨며’라는 한 줄 기도다. “오, 주님! 창조의 첫날처럼 오늘 하루를 열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 그분이 내 목숨을 거두어 가실지 누가 알겠는가. 귀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그러니, 사랑하자. 그러니 후회 남길 만한 일은 접어 두고 지금 당장 사랑하자. 죽음이 평등한 세상에 보잘 것 없는 목숨이라도 보살피고, 구상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잠시 잠깐이라도 행복한 순간을 기다리고 싶은 ‘영원한 오늘’을 맞을 일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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