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이야기-12] 가라지의 비유

“나중에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다.”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것이다. 상대할 자신이 없으니까 꼬리를 내리면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던진 한마디다. 실제로 세상을 살다보니 이 말은 썩 잘 들어맞는다. 그래서 괜한 허세를 부리지 말라는 뜻으로 “떠날 때는 말없이”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나중에 두고 보자.”는 말이 정말 무섭게 느껴진다. “내가 추수 때에 추수꾼에게 일러 가라지를 먼저 뽑아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버리겠다.”(마태 13,30)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중에 보자는 말을 허투로 들었다간 큰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는 농사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비유를 듣다보면 나도 어느새 농사일에 전문가가 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가 바로 그 경우다. 어떤 농부에게 밀밭이 있었다고 한다. 제법 크게 경작을 해서인지 종들까지 있어 수시로 경작지의 상태를 주인에게 알려왔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이삭이 팰 무렵에 자세히 살펴보니까 밭에 밀 말고도 엉뚱한 곡식(가라지)이 자라고 있더란다. 종들이 와서 “밀농사를 크게 망치기 전에 하루빨리 가라지를 솎아내어, 최소한의 피해만 보자.”라는 제안을 주인에게 한다. 그러나 주인은 행여나 다 자란 밀이 뽑힐까 염려되어 “기왕 이렇게 된 것, 추수 때까지 기다려 보자.” 하고 관대한 결단을 내렸다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속뜻은 접어 두고라도 우리네 상식으로는 농부가 내린 결정이 그리 신통해 보이지 않는다. 우선 씨를 뿌린 후에 수시로 밭을 돌보며 김매기를 진작 좀 해 두었다면 이삭이 팰 무렵에야 낭패를 겪지 않았을 터다. 그리고 후에라도 잘못을 깨달았으면, 더 이상 늦기 전에 잡초가 영양분을 빼앗아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당연하지 그대로 방치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주인의 처사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농사법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를 두고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 추수 때 알곡만 거둔다지만... ⓒ한상봉

신구약 새 번역 성경에는 밀밭에 곁다리로 자라난 곡식을 두고 ‘가라지’로 번역했지만 실상 가라지는 조밭에서 자라는 잡초이고, 밀밭에서는 ‘독보리’가 자란다고 한다. 그리고 독보리란 겉모양으로는 밀과 구분하기 어렵고 알맹이의 크기도 비슷하기 때문에 종자 차원에선 선별이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이삭이 패기 전에는 밀밭에서 독보리를 가려내기 힘든 노릇이다. 게다가 잡초들은 야생의 식물인 까닭에 인위적인 농작물들과는 달리 그 뿌리가 강해 좀처럼 뽑혀지지 않는 특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가 거저 생긴 게 아니란 말이다.

이 설명에 따르면 김매기도 불가능하고, 설혹 이삭이 팼더라도 주변의 밀과 같이 뽑혀 나올 가능성이 짙어 그저 추수 때까지 독보리를 놓아두는 것이 상책이다. 주인 농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독보리가 몹시 얄미웠을 테지만, 행여 그것을 뽑다가 밀 이삭마저 다칠까 몹시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 역시 혼신의 힘을 기울여 농사를 짓는 농부들의 애틋한 마음을 낱낱이 짐작하고 있었기에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었으리라.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원수가 그랬구나.”라고 한 28절의 말씀이다. 밭의 상태를 점검하던 종들이 급하게 달려와 잡초를 뽑아버리자고 하자 주인이 간단하게 정리한 상황이다.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원수는 누구일까? 원수는 수시로 하느님 나라를 넘보는 사탄일 수도 있고, 사람의 혼 줄을 빼놓는 귀신일 수도 있고, 제자들에게 나쁜 물을 들이는 바리사이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일단 뿌려진 나쁜 씨는 추수 때까지 발견되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종들의 예리한 눈은 그들을 발견했고 결국 주인까지 알고 말았다. 이제 솎아내어질 위기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나쁜 씨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셈이다.

얼마 전 교황은 동성애자들을 두고 파격적인 발언을 했다. 대충 간추리면, 만일 그들이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경우 예수님이 그들을 거절했을 리 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교황의 견해는 주교회의에 수용되지 않았다. 여기서 ‘교황무류교리’를 떠올릴 수도 있으나 교황무류교리란 교황이 교황좌(敎皇座)에서 행한 신앙이나 도덕 또는 교리에 관한 설교나 선포한 교서의 내용이 틀림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즉, 교황의 사적 견해까지 가톨릭교회의 공식 입장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사목적 배려’다. 교회법으로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인정할 수 없으며 아무리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교회가 동성애 자체를 권장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의 인권까지 말살해서는 안 될 노릇이고. 예수님이 어디 창녀를 박대하고 세리를 내치신 적이 있는가 말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 가라지란 교회법과 사목적 배려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다.

동성애자는 악마의 작품도 아니고 귀신이 씌운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다. 따라서 동성애자를 두고 악마 운운 하는 그리스도인은 정신 차려야 한다. 교황의 충고를 기억하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최후심판 때 동성애자를 먼저 뽑아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버리실까? 사실 이것도 의문이다.

역시 “나중에 두고 보자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 없다.”라는 말이 맞는 것일까?


박태식 신부
/ 대한성공회 장애인센터 '함께 사는 세상' 지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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