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열의 떼제 일기]

수단 젊은이 일곱 명이 떼제에 도착한 것은 목요일 밤이었다. “칼레에 있는 난민들을 내년 봄까지 맞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지방 정부의 문의를 받고 응답한 지 1주일이 훨씬 지났을 때였다. 우리는 마을 한 복판, 자원봉사자와 방문자의 숙소로 쓰이지만 겨울에는 비어 있는 집에 12명의 난민을 맞기로 했다. 그 대신 원하는 사람들만 보내 달라고 당국에 부탁했다. 그런데 희망자가 적었는지, 예고된 도착일이 계속 미루어지다가 마침내 이들이 온 것이다. 이곳에 오는 난민들이 모두 수단 사람이며 그 수가 일곱 명이라는 것을 우리는 당일에야 알게 되었다.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고향 ‘다르푸르’를 탈출해 리비아에 가서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온 이 망명자들은 모두 흑인 이슬람교도였다. 이브라임, 하산, 아메드, 모르토바, 모리딘, 아담, 아메드란 이름을 가진 이들의 나이는 19살에서 27살 사이. 떼제에 도착해서 맨 처음 던진 질문 가운데 하나는 “근처에 모스크(이슬람사원)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튿날이 바로 금요일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양탄자를 가져다 주었다.

떼제에 오기 전에 이들이 머물렀던 칼레는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을 바라보는 항구도시다. 영국으로 가는 해저 터널의 입구가 여기에 있다. 얼마 전부터 각국 출신 난민 6000명이 이곳에 몰려들었다. 난민들은 텐트 생활을 하면서 영국으로 가는 화물차나 화물선에 오르거나, 기차에 몰래 올라탈 기회를 엿보며, 수없이 승차를 시도하고 있다. 프랑스 경찰의 단속이 심해지고 영국 정부의 비용으로 세운 울타리가 점점 많아졌지만 난민들은 계속 늘었다. 위생 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그곳에서 난민은 한 끼 식사를 하기 위해서 몇 시간씩, 씻기 위해서는 며칠씩 기다려야 했다. 참을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는데도 정부가 손을 놓고 있다며 시민단체가 법원에 제소하기에 이르렀다. 좁은 공간에 수많은 난민이 몰려 빚어진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상황 때문에 언론은 ‘칼레의 정글’이라고 불렀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이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된 정부가 마침내 움직였고 프랑스 각지로 이들을 분산 수용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영국행을 포기하고 알 수 없는 프랑스의 다른 지방으로 가려는 희망자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적지 않은 난민들은 영국이 불법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얻고 살기에 더 쉽다고 여긴다.) 마찬가지로 우선 내년 봄까지라도 이 난민들을 맞아들이겠다는 지방자치 단체를 찾는 것은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톨레랑스'의 프랑스라고 해도 많은 도시와 마을은 난민을 맞아들이기를 꺼린다.

▲ 떼제에 도착한 수단 청년들과 이들을 맞는 공동체 수사들.(사진 출처 = 신한열 페이스북)

지옥과 정글을 벗어난 망명자들

떼제에 온 청년들은 그저 안전한 장소를 찾아 나선 망명객이었다. 이들은 21세기 최초의 인종 학살이 자행된 수단 서부 다르푸르에서 나서 자랐고 삶의 대부분을 난민촌에서 보냈다. 거기서 남자 아이들은 성인이 되면 언제 민병대에 끌려갈지 모른다. 살아남기 위해서 가족들이 그들을 떠나 보냈다. 이들은 리비아로 가서 브로커에게 250-500유로 상당을 지불하고 유럽행 작은 보트를 탈 수 있었다. 열흘 동안 목숨을 건 항해 뒤에 도착한 곳은 이탈리아. 거기서 다시 우여곡절 끝에 기차 화장실에 숨어서 파리까지 갔다. 한동안 다리 밑에서 지내다가 칼레에 가면 먹을 것을 준다는 말을 듣고 거기까지 간 것이다.

하지만 그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절도와 폭력이 횡행했다. 이들이 칼레에서 보낸 기간은 하루에서 한 달 사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찾던 이들은 떼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칼레의 정글을 빠져 나오기 위해 떼제행 버스에 오른 것이었다.

다행히 떼제에는 아랍 말을 하는 이라크 난민 두 가정이 얼마 전부터 살고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우리 공동체는 이번에 난민을 맞이하기 전에 집집마다 찾아가 주민들에게 알렸다. 다행히 별 반대가 없었다. “숙소가 더 필요하면 우리 집에도 방이 있다”고 말한 사람은 10여 년 전에 이곳에 정착한 르완다 난민이었다. 수단 청년들이 도착한 뒤로 어떤 주민은 자전거를 빌려 주었고, 또 어떤 사람은 구식 삼륜차에 태워서 단풍이 아름다운 숲 구경도 시켜 주었다. 식사 때마다 우리 수사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한두 명씩 번갈아 가며 함께 한다. 이들은 불어도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

수단 청년들은 조용한 이 마을에서 빨리 안정을 찾았다. 이들이 떠나온 고향 다르푸르는 인종, 종교, 경제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내전 때문에 유엔에 따르면 2003년부터 45만 명이 학살당하고 250만 명이 이주당한 곳이다. 떼제에 온 청년들은 모두 흑인이다. 이들은 같은 이슬람교도이지만 인종적인 이유로 아랍계 사람들에게 무시와 박해를 받았다. 전혀 모르고 왔지만 여기서 받은 환대 때문일까, 이들은 모두 프랑스에 망명하겠다고 했다.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 신청서를 작성하면서 가족 사항에 모두 부인이나 약혼녀의 이름을 적었는데 열 아홉 살 나세르만 빈칸으로 남겼다. 다른 청년들이 “넌 아직 어린애구나 !”하고 놀리자, 그는 약혼녀가 아랍계 이슬람 민병대에 살해당했다는 얘기를 하면서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이들은 신실한 이슬람교도들이다. 우리는 공동체의 친구인 샬롱의 이맘에게 연락했다. 며칠 뒤에 그는 이슬람 신앙 서적과 기도용 카펫을 가지고 떼제로 와서 오랫동안 청년들을 만났다. 그 다음 금요일에는 수사 두 사람이 샬롱의 모스크까지 이들을 동행해 예배에 참석할 수 있게 했다.

그건 이슬람이 아닙니다

수단 청년들이 떼제에 온 지 일주일 뒤에 파리에서 무참한 유혈 테러가 있었다. 공동체의 주일 점심 식사에 초대받아 온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에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사람들이 이슬람을 빙자해서 이런 폭력을 자행하지만 이것은 이슬람이 아닙니다. 이슬람은 생명을 존중합니다. 쿠란이라고도 불리는 우리의 거룩한 경전은 사람들은 물론 동물조차 함부로 해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아랍말로 망자를 위한 노래를 불렀다. 온 마음을 담은 기도였다.

그 주간에 마침 리옹에서 20여 명의 이슬람 수피들이 떼제를 방문했다. 그들을 동행한 크리스티앙 들로름 신부는 우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떼제에서 만난 수단 청년들에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형제를 죽이는 전쟁의 지옥을 피해 온 이 청년들은 평화의 사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대표격으로 보이는 이브라임은 우리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수단에서는 이슬람교도가 다른 이슬람교도를 박해하고 살해합니다. 그건 이슬람일 수 없습니다. 진정한 이슬람을, 우리는 이곳 떼제에 와서 발견했습니다.”

수많은 난민들에 비하면 이들은 그래도 다행인 편이다. 이 청년들이 칼레를 떠나온 뒤에 그곳에서는 며칠 동안 프랑스 경찰과 난민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어떻게든 영국으로 가려는 난민들에게 경찰은 최루탄을 쏘았고 난민들은 경찰에게 돌을 던졌다. 그런데 파리 테러 이후로 칼레의 정글은 더 이상 보도에 나오지도 않는다. 추운 겨울이 시작되는데 그곳 천막에서 지내는 수천 명의 난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

사실 프랑스의 많은 마을과 도시에서는 난민을 받지 않으려 한다. 개인이나 단체가 자기 소유의 빈집에 난민을 맞이하겠다고 해도 행정상의 이유로, 자치 단체장이나 주민들이 반대해서 성사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기서 가까운 두 곳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우리 공동체가 수단 청년들을 맞이한 소식이 지역의 유일한 일간신문에 한 면 가득 실리자, 인터넷 기사에는 이를 비난하는 댓글이 수없이 달렸다. 신문사에서는 결국 댓글을 다 지우고 기사조차 내려야 했다.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 인종주의적인 편견은 곳곳에 숨어 있다.

시리아 난민은 그나마 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그런데 파리 테러범 가운데 둘이 위조된 시리아 여권으로 난민들 틈에 섞여 들어온 것이 보도된 다음에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국민의 안전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난민과 이민을 막아야 한다는 우파와 극우파의 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떼제에 온 수단 청년들이 우리에게는 귀중한 선물이다. 그들이 언제까지 여기 머물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망명 신청이 접수되고 그들이 난민 지위를 얻게 되면 아마 공부나 일거리를 찾아 떠나야 할 것이다. 일부는 떼제 근처에 남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일 거부된다면?

이 청년들은 어떻게 될까? 내년 봄이면 프랑스에서 두려움 없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 그때까지 프랑스가 선포한 전쟁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까 ? 그것이 난민과 이민자들, 이슬람교도에 대한 프랑스 사람들의 시선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 ?
 

 
 
신한열 수사
떼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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