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38]

난 밥을 서서 먹는다. 우리 집 식탁이 애초 스탠딩바로 조성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스탠딩파티의 날치알을 올린 롤, 깃발을 꽂은 꼬마 샌드위치같은 핑거푸드나 걸으면서 즐기는 커피 한 잔의 여유는 당연히 없다. 대신 압력솥 밑바닥의 누룽지를 박박 긁어서 김치와 김을 곁들여 먹는 1첩 반상이 주를 이룬다. 나는 서서 로를 어부바 하고 있는 중인데 등 뒤의 로는 어부바를 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3초 이상 정지 자세로 있으면 어김없이 머리끄덩이를 잡히고야 마는데 고문 같은 아픔은 둘째요, 요새 들어 부쩍 머리숱이 준 것만 같아 흰머리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는 나는 멀쩡한 검은 머리가 뽑혀 나가는 것만은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다. 밥을 먹으면서도 로가 역정을 내지 않도록 부지런히 몸을 앞뒤 좌우로 흔들고 하릴없이 집 안을 한 바퀴 돌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밥풀이 발등에 떨어지고 김치 국물은 턱을 타고 흐른다. 그래도 허기를 면하는 게 워낙 급하고 당면한 과제인지라 그야말로 눈을 홉뜨고 밥을 먹는다. 작년에 안 왔던 각설이가 올해는 온다면 감히 나한테 밥을 빌어먹자고는 못할 것이다. 옆에서 밥을 먹던 욜라가 “엄마 이것 보시롱~”하면서 바보 흉내를 내다가 식탁의자에서 굴러 떨어져서 울기를 한 차례, 팔을 휘젓다가 그럼 그렇지, 밥그릇을 엎고 물컵을 넘어뜨리더니, 이번엔 갑자기 오줌을 누겠다고 하고선 바지를 못 내려 낑낑대다 옷에 오줌을 쌀 때도 나는 태연자약하다. 내게 오직 중요한 것은 내 앞에 놓인 밥! 입에 밥을 허겁지겁 떠 넣으며 한소리를 하긴 한다.

“엄마 밥 먹어야 돼, 엄마 배고프단 말이야. 엄마도 밥을 먹어야 힘이 나서 너흴 돌볼 게 아니야? 퍽퍽퍽(밥 떠 먹는 소리)” 왠지 목이 멘다. 그러다 급히 먹는 밥알이 코로 들어가 사레가 들리면 내 설움은 폭발하고 마는 것이다.

▲ 자동차놀이 하는 형제. 로의 머리위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욜라의 못된 손. ⓒ김혜율
“엄마한테도 엄마가 있어!(꽥) 외할머니가 엄마의 엄마잖아. 엄만 외할머니의 딸이고. 근데 딸이 밥 못 먹어봐, 엄마가 얼마나 걱정하시겠어? 응? 그러니까 엄마의 엄마 속상하지 않게 엄마도 밥 먹어야지. 엄마도 딸이니까! 훌쩍” 아이코나, 눈물이 난다. 욜라는 방금 엄마가 한 소리가 무슨 말인지 아리송하기만 하고. 로를 업은 채 서서 먹는 끼니! 그것도 온갖 방해공작 속에서! 이를 두고 ‘포대기 투혼’이라고 부르는 데에 어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포대기 투혼은 집안 청소, 식사 준비, 빨래 널기, 설거지 같은 가사노동 외에도 화장실 가는 길에도 이어진다. 화장실 문이 닫히면 엄마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줄 알고 우는 로는 견딜 수 있으나, 우는 로 등을 타고 논다든가, 로 머리 위에 온갖 것들(장난감, 쓰레기, 먹을 것, 담요 등)을 들이 붓고 재밌다고 낄낄대는 욜라가 너무나 두렵기 때문이다. 난 그 부분 욜라를 타이르는 데 할 만큼 했고, 한다한다 하니 더한다고, 갈수록 잦아지고 사정없어지는 욜라의 공격으로부터 로를 지키려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다.

‘에휴, 말 안 듣는 애들을 키우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는 그림책 ‘피터 래빗’시리즈의 말썽꾸러기 네 마리 아기 고양이의 엄마인 타비타 부인의 한숨어린 탄식이다. 그녀는 물론 고양이 엄마니까 고양이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동병상련을 느끼는 몇 안 되는 상대다. 말썽꾸러기 아기 고양이 ‘톰 키튼’이 엄마 말 안 듣다가 고양이 푸딩을 만들어 먹는 무시무시한 시궁쥐에게 잡혀 온갖 고초를 겪는 장면에서 난 물끄러미 욜라를 바라 보았다. 욜라가 고양이로 태어났으면 충분히 겪고도 남을 모험이었기에 왠지 남일 같지 않았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칼럼 만큼은 욜라에 대한 고발을 자제하고 떠오르는 다크호스! 로에 대해서 말할 작정이다.

그렇다. 로는 욜라에 버금가는, 아니 월령 대비로 보자면 욜라보다 한 술 더 뜨는 아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다. 내게 과연 아이 키우기에 대한 재능이 개미 눈꼽만큼이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로의 생후 두 달 쯤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 유모차에서 의기양양하게 카메라를 보고 있는 로. ⓒ김혜율
그 당시 로는 낮잠도 곧잘 자고, 저녁 여덟 시만 되면 혼자 놀다가 스스르 잠들어 내리 여덟 시간을 자고 일어나던 어진 백성이었다. 이 부분은 세 아이 모두 공통된 부분으로 어찌보면 나는 상위 1퍼센트의 지극히 수월한 아이를 키운 행운의 화신임에 틀림이 없다. 이것은 아이를 직접 키워 본 엄마들이 증언할 것이다. 신생아 땐 잘 먹고 잘 자고 하는 것이 지상최대의 과제인 만큼 그 자체가 수월하지 않은 일임을. 그맘때 보통의 신생아는 엄마가 잠을 못 자게 밤에 몇 차례 깨서 울고 토막잠을 자고 눕히면 바로 작동하는 등센서라는 게 달리기 마련이다. 그러다 아기가 백일쯤 되면 흔히들 ‘백일의 기적’이라고 하는 육아에 있어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시기가 온다. 그동안의 엄마의 노고를 아이는 다 알고 있었다는 양 잠도 길게 자고 먹는 것도 안정적이며 여러모로 순둥이 모드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잠깐잠깐의 시행착오와 어려움이 있겠지만 아이는 성장하고 엄마는 그와 동시에 육아의 각종 노하우를 습득하며 육아 달인이 되어 간다는 것이 육아에 있어 보통의 시나리오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래, 알고만 있지 나는 그것을 직접 겪지 못한 위인이다. 메리와 욜라, 로 세 아이들은 커 갈수록 난해하고 통제불능이며 제멋대로다. 이것이 나의 착각이라면 차라리 좋으련만! 말도 못하고 이제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서있는 게 고작인 로가 날 애먹인다면 얼마나 애먹이겠냐만 글쎄.... 일천한 나의 글로는 그 정도를 다 설명하지 못할 따름이다. 사실 로는 정말이지 귀엽다. 항상 ‘엄마찾아 삼만리’라고 자기한테서 세 발짝만 떨어져도 눈물콧물 흘리며 쫓아 올 때도 귀엽고, 중이염에 걸려 근 삼 주 동안 약 먹을 때마다 안 먹겠다고 고개를 획획 돌려가며 입을 닫고 푸푸 거리며 잉잉 우는 그 얼굴도 귀여웠고, 젖 먹을 때마다 만족한 듯 발로 까딱까딱 장난치는 그 모습도 귀엽고, 심지어는 똥을 싸고 그 똥이 바지 허릿단 위로 올라와 노랗게 물이 든 채로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모습마저 귀엽게 보이는 나는 천상 ‘아들바보’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아이가 말이지, 백일을 기점으로 ‘기적’이 아니라 날 ‘기절’을 시키고 있다. 뭐 나처럼 처음에 잘 나가다가 ‘백일의 기절’을 맛보는 케이스도 더러 있는 듯 하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백일을 지나고 언제부터인가 밤에 잘 자다 일어나 젖을 찾아 우는 경우가 한두 번 있더니 요즘은 아예 한 시간 단위로 깨서 운다. 그렇다면 하룻밤에 자그마치 일고여덟 번을 깨서 울어 젖힌다는 것인데 그때 젖을 주지 않고 그냥 토닥토닥 재우려 했다간 뒤로 넘어가며 울음소리를 두 옥타브 올린다. 그쯤이야 감수하고 버릇을 단단히 고쳐야겠다고 난들 왜 마음먹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일 때문에 바빠 네댓 시간 겨우 자는 남편의 단잠을 깨울까봐 더 신경 쓰이는 나는 로가 애~하고 신호를 보내면 벌떡 일어나 눈 감은 채로 젖을 준다. 처음엔 졸다가.... 한참 지나면 다리에 쥐가 나고.... 그러다 보면 창문 밖으로 시린 밤하늘에 떠 있는 달님이 내 가슴에 들어온다. 이 작은 폭군은 밤마다 수차례 내 잠을 다 달아나게 한 뒤에야 무릎에서 굴러 떨어지며 잠에 빠져든다.

어진쑥떡 같던 온순한 성격도 점점 괴팍해져 수틀리면 죽어라 울어 젖히는데 아무도 못말린다. 언젠가 친정에 있을 때였다. 밤 늦게 로를 재워 놓고 동생들과 밤마실을 나간 적이 있다. 나보다 석 달 앞 서 첫 아이를 낳은 셋째 동생의 육아 스트레스도 풀어 줄 겸 자매간 화합도 다질 겸 해서 분위기 좋은 데 드라이브 가서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오면 좋을 것 같았다. 일단 그때 메리가 따라 붙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모들하고 잠깐 놀다 오마고 아무리 간청을 하여도 메리 고집을 꺾을 수가 있나, 밤 열두 시가 넘도록 안 자고 놀다가 기어이 어른들 가는 데 따라나서는 메리가 혹처럼 느껴져 기분이 상했지만 동생들이 봐 주자고 하여 어쩔 수 없이 끼워줬다. 그런데 젊은 피인 동생들은 자연을 벗 삼고 커피향을 맡고 싶었던 나와는 다르게 노래방에 가자고 하였고 나는 메리를 데리고 노래방(자그마치 유흥업소, 그나마 청소년출입가능 업소였지만)에 가기에 이른다.

▲ 로를 목마 태워주는 메리. 로가 머리카락을 잡아 뜯어도 참고 있는 메리와 욜라. ⓒ김혜율
동생들은 뭔가 세련된 요즘 노래를, 나는 8090노래를 각자 한 곡씩 불렀을까, 갑자기 집에서 호출이 왔다. 로가 깨서 울고 있다고. 하지만 우는 아이 달랠 사람이 부모님 외에도 남편이 있지 않은가. 동생들과 나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 두어 곡씩을 더 불렀다. 탬버린 치던 메리는 잠이 들고 집에서는 두 번째 호출이 왔다. 첫 번째 전화로부터 십여 분이 더 흐른 때였는데, 지금까지 로가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으니 급히 들어오라는 전갈이었다. 결국 노래방과는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노래방 화면에선 마지막 곡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너에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집에 차를 대고 내리니 로의 울음소리가 새벽녘 온 동네에 사이렌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이 넷을 키운 친정 엄마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다 해탈을 하셨고, 영유아 돌보기 달인인 친정 아빠는 완연한 백기를 든 채 였으며, 외국 갔다가 오늘 막 귀국한 남편은 혼이 다 달아난 듯했으나 마지막까지 다둥이 아빠로서의 의연함은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떡하든 달래서 재워 볼까 했는데, 절대 안 달래지데....’ 라는 말을 남기며 침대에 풀썩 쓰러지고야 말았지만. 로는 나에게 안기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고, 야밤의 외출은 그렇게 로 덕분에 미완성인 채로 끝나고 말았다. 나는 로를 안고 못다 부른 서태지와 아이들의 ‘너에게’를 흥얼거렸다.

“니가 아무리 지금 날 좋아한다고 해도
그건 지금뿐일지도 몰라....
왜냐하면 어 그건 말야
:
너무 많은 생각들이 너를 가로 막고는 있지만
날 보고 웃어주는 네가
"그냥 고마울 뿐이야"
:
너를 만난 후 언젠가부터
나의 마음속엔 근심이 생겼지
네가 좋아진 그 다음부터
널 생각하면 깊은 한숨뿐만
:
어른들은 항상 내게 말하지
넌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이 더 많다고”

특히 마지막 구절이 가슴을 후벼 팠다. 아이 키우기가 처음도 아니고 세 번째임에도 어려워 쩔쩔 매는 나. 뭐 하나 쉬운 게 없고 내 맘대로 되는 것도 없다. 고로 나는 애 셋 낳았다고 어디 가서 아는 척 못한다. 하나 낳아서 야무지게 키우는 사람만 못하다.

로가 잠 좀 안 자고 하루 종일 나한테 매달려 내 허리를 휘게 만들어도 잘 먹고 건강만하다면 또 무슨 걱정이랴. 로는 젖 외에는 어떤 고급이유식을 대령해도 퉤 뱉어버리기 일쑤고 몇 개월째 감기를 앓으며 병원을 들락거리고 있다. 로는 명백히 ‘일인분’이다. 얼렁뚱땅 살짝 끼워 키울 수가 없다. 하하하 난 참 복도 많지. 내가 훗날 세 아이를 키우고 나서 부를 노래는 무엇이 될까?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이런 노랫말은 아니기를 바란다.

달님, 오늘 밤 달님은 알고 계시지요? 그 예전 메리에게, 욜라에게 제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몇 번이나 잠 깨어 로를 가슴에 안았다 내렸다하며 그 작은 어깨를 토닥여줬는지를요,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고 더운 숨을 불어 주려 했는지를요.

 
 

김혜율 (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4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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