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용 신부] 11월 22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요한 18,33-37

요즘 젊은이들이 술자리에 모여 하는 놀이 중에 “왕게임”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게임은 먼저, 모인 사람 가운데 한 명을 뽑는데 이때 뽑힌 사람은 왕이 됩니다. 그러면 이 왕이 된 사람은 나머지 사람에게 정말 왕처럼 행동하는 것이 놀이의 전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엉뚱한 포즈를 요구하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을 명령하기도 하는데 이럴 때 지목 받은 당사자는 곤혹스럽지만 지켜보는 사람은 왕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의 행동에서 웃음이 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왕이란 우리의 머릿속에 마음대로 해도 되는 사람, 다른 사람을 부릴 수 있는 절대 권력의 소유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왕 역시도 언제나 반말을 하고 다른 사람의 섬김을 받으며 최고의 지도자로 위엄을 나타내는 모습뿐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왕, 참된 왕도 이런 모습일까요.

여기 우리 앞에 한 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왕은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살았습니다. 보통의 왕들은 으리으리한 왕궁에서 태어나 많은 대신의 축하와 환호 속에 태어나지만, 이 왕은 어찌된 일인지 왕궁이 아닌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무도 반겨 주는 이 없었고 고작 가난하고 힘없는 몇 명의 목동만 그의 탄생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이 왕은 태어나자마자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 가야 했습니다. 이 왕이 태어나자마자 만난 것은 성대한 축하연이 아닌 가난과 박해였습니다.

▲ '빌라도의 법정', 빌헬름 코타르빈스키.(1848-1921)

그는 거대한 왕궁은커녕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이 왕은 자신의 백성을 만나러 길을 나섰습니다. 보통의 왕들이 백성들을 만나려 길을 나서면 엄청난 수의 수행원이 따라갑니다. 왕을 보호하기 위한 경호 인력과 왕의 자문을 위한 당대 최고의 학자와 관료들이 왕의 행차를 수행합니다. 하지만, 마구간에서 태어난 이 왕을 지켜 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제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말처럼, 이 왕은 철저한 고독 속에서 지냈습니다. 그저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 고기잡이 일을 하던 사람 몇몇을 비롯한 열 두 명의 제자가 그를 따랐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제자라는 사람들 역시 때때로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툼을 벌였고, 나중에는 당신의 나라가 오면 자신을 오른쪽과 왼쪽 자리에 앉게 해 달라 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왕을 수행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왕께서 이들과 함께 하며 그들에게 세상의 이치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왕은 정말로 백성을 사랑했고 하나라도 더 만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고 선포하였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쳤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을 찾아갔고, 죄를 짓고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용서를 전하며 그들 역시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쳤습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던 세리도, 창녀도, 간음한 여인도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죄인이라고 해서 막혀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한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한 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백성들은 자신들의 참된 왕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빵을 달라 청했고, 지금 당장 무력으로라도 로마를 무찔러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높은 경제 성장과 세속적 의미의 강대국이 되기를 바랐기에 사랑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이야기하는 이 마구간의 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이 자가 왕이 되려했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우리들의 왕이 아니라 말하며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 23,29)하고 모욕했고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보아라....”(루카 23,37)하며 비아냥거렸습니다. 하지만 이 왕은 끝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며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참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알아보며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맞습니다. 이 왕은 바로 예수 그리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살았던 한 사나이를 우리 모두의 왕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왕, 예수 그리스도는 왕궁이나 왕관도 없고 자신을 따르는 군사나 대신들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구간의 가난과 가시관의 고통이 언제나 이 왕을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참된 왕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누구에게 지시하고 위에서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진정으로 섬기고 봉사하는 왕, 단순히 먹거리를 해결해 주는 지도자가 아니라 죄를 씻고 영원한 생명을 마련해 주는 임금으로서 그리스도를 참된 왕, 세상을 다스리시는 임금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빌라도와의 대화에서도 예수님이 참된 왕이란 사실은 잘 나타납니다. 빌라도는 사회가 요동치자 예수님을 처형할 명분을 찾았고 예수님께서 “내가 유대인들의 왕이오”라고 자처하고 나오기만 한다면 문제는 간단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정치범으로 쉽게 처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낸 질문이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요한 18,33)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세속적 왕이 될 생각도 없거니와, 당신의 다스림은 돈이나 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며, 그분의 다스림은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며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참된 주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사실 하나를 보여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마치 부모가 아픈 자식을 걱정하고 참된 왕이 가난하고 병든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사랑으로 인간을 창조한 신께서 인간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사실이 바로 이 세상의 이치요 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러한 사랑의 왕, 정의의 왕, 진리의 왕을 알고 있는 우리 모두도 그분의 통치 철학 안에서 참된 백성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 섬기는 사람, 봉사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가오는 한 주, 그러한 왕께서 나를 알고 계시고 나를 굽어보고 계시다는 사실 안에서 우리도 왕을 따라 충성을 맹세하는 충신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수용 신부 (이냐시오)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