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용 신부] 11월 15일 (연중 제33주일) 마르 13,24-32

하루를 살아가면서 내일 뭐해야 하고, 다음 주까지 무엇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은 참 많이 하지만,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할지 상상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당연하게 맞이할 순간이고 피할 수 있는 때가 아님을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일이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현실이 분주하고, 지금의 고민으로도 충분히 바쁘기에 그런 일은 말 그대로 먼 미래의 일로 여깁니다. 혹은 어떤 사람에게는 막연한 두려움이나 그저 피하고 싶은 마음에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는 일을 싫은 일이 됩니다. 이유가 어떠하든 우리는 분명히 찾아올 그때, 어찌 보면 지금보다 더 중요한 그 순간을 전혀 준비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저라고 해서 마지막 순간을 자주 의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다음 주까지 보내야 할 원고 때문에 신경이 쓰이고, 오늘 급하게 참석해야 하는 회의나 모임에 신경이 쓰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직 살아온 시간만큼 살아갈 날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일상에서 전혀 의식하지 않으며 매일을 맞이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각자의 마지막 순간, 하느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갈 그때는 분명 현실이고 시나브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언제일지, 어떤 모습일지 알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물론, 몇 가지 상상해 볼 수 있는 장면도 있습니다. 나의 할아버지나 할머니, 혹은 다른 이웃 어른들의 마지막 순간을 알고 있기에 똑같지는 않아도 나도 그런 모습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란 사실 말입니다. 그때 우리 몸과 마음에는 어떠한 변화들이 먼저 올 것입니다. 조금 빠르게 진행될 수도 있고 아주 천천히 찾아올 수도 있지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면, 하느님을 만날 순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한 개인의 삶을 놓고 보면 이는 자연스러운 하나의 흐름입니다. 하지만 무섭기도 하고 피하고 싶으며, 이러한 이야기가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너무나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일을 불편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요? 어디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반드시 맞이해야 하는 그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런 방법을 듣게 된다면 우린 정말 다행이고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 '세상의 종말, 묵시록', 루카 시뇨렐리.(1502)

오늘 복음은 바로 그 사실을 전해 주는 말씀입니다. 물론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 각 개인의 마지막 순간이라기보다는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에 관한 말씀이지만, 그것이 개인적 차원이든, 온 우주적 차원이든 우리가 ‘무섭지만 피할 수 없다’는 그 모순적 상황을 극복하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마지막 순간에 일어날 일들을 알려주십니다. 복음은 독특한 문학 양식인 묵시문학적 표현을 통해 그 마지막 순간의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르 13,24-25)라는 표현은 마지막 순간을 묘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암시적으로 그리고 있기에 이를 두고 우리가 영화의 예고편처럼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맞이하게 될 세상 마지막 순간을 소개해 주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순간으로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 13,27)하고 알려줍니다. 하느님의 창조로 장엄하게 시작한 이 세상이 하느님께서 보내 주시는 성자의 재림으로 마지막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이는 반드시 찾아올 그 마지막 날이 공포와 두려움의 순간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세상 완성의 순간임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두렵지만 피할 수 없는’ 그날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며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멸망으로서의 종말이 아니라 완성으로서 구원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복음을 통해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이든, 이 세상의 마지막 때든 우리는 알 수 없는 그때를 두려워하고 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알지 못해 불안하고 무서운 그때를 우리의 주님과 함께 마무리 한다는 사실을 복음으로 먼저 들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분명 그때는 찾아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가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마르 13,28)는 것처럼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우리가 먼저 깨닫고 준비할 수 있기를 바라시고 그때에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님을 밝혀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듣지 않은 사람들처럼 공포와 두려움으로 그날을 피하는 사람들이 아닌, 희망과 기대 속에서 적극적으로 그날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 마지막에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 32)고 이야기 합니다. 천사와 예수님도 모른다는 그때를 어떻게 인간이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와 시간을 구체적으로 특정해서 말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을 거스르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종종 들리는 공포와 불안을 조장하는 거짓말에 속지 말고 우리는 복음이 전해 주는 위로 안에서 오늘의 하루를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수용 신부 (이냐시오)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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