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16]

1. 지난 주말 나에게는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정의, 평화, 민주 가톨릭행동(이하 가톨릭행동)’ 회원 삼십여 명과 함께한 1박2일 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피정은 가톨릭행동이 생긴 이래 처음하는데다, 이 행사 전 6주간에 걸쳐 진행된 ‘관상적 활동’ 강좌를 결산하는 자리라서 의미가 컸다.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일 년 전 ‘일상 영성 수련모임’을 표방하며 출범한 ‘녹는 소금’ 회원들이 이 행사를 주관한 일이 가장 뜻깊었다.

2. ‘지금 여기’는 단순하지만 어려운 말이다. 매 순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항상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니 사실상 ‘깨달음’과 같은 의미여서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면 ‘지금 여기’는 ‘실존적 종말론’으로 지금 이 순간을 늘 생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는 태도다. 이 글이 실리는 언론 이름인 <지금 여기>도 이 실존적 종말론의 태도로 예수를 추종하자는 뜻일 터.

3. 일 년 전 ‘녹는 소금’은 가톨릭행동이 목표로 하는 ‘관상적 활동가’를 양성하기 위해 출범했다. 그 사이 8주간 프로그램 3회기를 입문과정, 이 과정이 끝나면 8주간 2회기를 심화과정으로 하여 거의 만 일 년에 걸쳐 진행하였다. 수십여 명이 이 과정에 참여했지만 마지막 남은 회원은 네 명이었다. 이 네 명 가운데 세 명, 나, 다른 동반자 한 명 해서 다섯 명이 이 피정을 진행했다. 피정 프로그램은 MBSR을 응용한 명상법, 향심기도, 파커 J. 파머가 개발한 ‘마음 비추기’ 피정의 주요 순서인 ‘신뢰 서클’(Circle of Trust) 등으로 구성하였다. 피정 참가자들은 시종일관 침묵의 분위기를 유지하며 진지한 성찰과 나눔을 이어 갔다. 각자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관상적 활동가로 살겠다는 결심도 새롭게 하였다. 무엇보다 흐뭇했던 일은 광장에서 혹은 SNS로만 만나던 이들이 소속감을 확인하며 깊은 만남을 가진 점이다.

사진 출처 = 예수살이 공동체 홈페이지

4. 현장에 있다 보면 승산 없어 보이는 싸움 때문에 지치고, 같이 하는 이들과 생각이 달라 다투게 되며, 적대자들의 이데올로기 공작으로 세인들로부터 늘 정당성을 의심받고, 때로 정치적 경제적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해야 한다. 처음에는 광장을 메우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일상으로 돌아가면 외로움 이상의 공허함도 느껴야 한다. 대의와 남은 이들이 내어 주는 곁이 있어 힘을 내보지만 그래도 지치는 건 어찌할 수 없다. 그래서 지치지 않고, 남을 원망하지 않으면서, 즐겁게 끝까지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 관상이 필요하다.

물론 관상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진 않는다. 그래도 그동안의 경험에 미뤄 보면 영성 훈련을 꾸준히 할 때 반대 입장을 가진 이들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반대하기 쉬워지고, 늘 적보다 더 힘든 같은 편의 생각이 다른 동료들도 수용하기 편해진다. 무엇보다 분노로 자신을 파괴하는 일을 예방할 수 있다. 세상 대부분의 일이 특히 전, 현 정부의 정책들이 분노를 자아내지만 분노한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진 않는다. 오랜 시간 치밀하고 꾸준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싸워야 작은 것이라도 변화를 만들어 낸다. 화를 내더라도 파커 J. 파머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그들은 괴물이 아니라고 믿어야 한다.’

파커 J. 파머는 사십 년 동안 평화운동에 참여하면서 증오로는 반대자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그들도 나처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 생각해야 나중에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 최소한 ‘서로 괴물은 아니라 생각할 수 있고, 또 그래야 변화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물론 대결의 한복판에서 이런 생각을 하긴 어렵다. 게다가 저들 때문에 지치고 상처를 입은 경우라면 상대방을 괴물로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 그가 고안하게 된 영성 프로그램이 ‘마음 비추기 4계절 피정’이다. 계절에 한 번 2박3일씩 진행되는 이 피정은 침묵 속에서 쉬고, 함께 참여하는 다른 피정자, 잘 준비된 안내자들과 함께 자신을 비추고 서로를 비추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여기서 비춘다는 것은 ‘성찰한다’는 뜻에 가깝다. 이 과정을 통해 참가자들은 자신과 자신의 일, 운동을 객관화시켜 보게 된다. 그리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의 생각을 편견 없이 듣는 과정에서 위안을 경험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소진(burnout)이 양심의 소리와 어긋나는 일과 그런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사실, 즉 온전하게 통합된 삶이 아닌 분리된 삶 때문에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피정이 거듭될수록 그는 양심의 소리에 응답하게 되고, 궁극에는 분리된 삶을 청산하겠다는 결심에 이르게 된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5. 나는 이런 피정 프로그램은 물론 일상에서 이런 자세를 쉽게 갖도록 해 주는 영성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몇 년 전부터 절감해 왔다. 그래서 일부는 직접 가서, 어떤 것은 직접 해 보면서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녹는 소금’에서 진행했던 프로그램은 이러한 준비과정에서 나름 검증을 거쳐 선별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를 이 피정에도 적용해 보았다. 아직 판단하긴 이르지만 피정에 적용한 프로그램들이 다수 참가자들에게 공감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회원의 참여와 검증을 통해 우리도 2-3년 내에 ‘마음 비추기 피정’과 같은 활동가를 위한 ‘영성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6. 영성은 ‘-을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저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 매일 자신과 자신이 속한 단체를 객관화시켜 보고, 내적 침묵 속에서 자신의 참 자아와 만나다 보면 식별이 쉬워진다. 밀고 나가는 힘과 용기도 커진다. 굳이 반대자를 괴물로 만들지 않고도 옳지 않은 일을 반대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가까이 있는 동료와 차이를 존중하며 뜻을 모을 수 있다.

물론 이 일이 저절로 되진 않는다. 고요한 침묵의 시간과 일상의 모든 행동 안에서 깨어 있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처음엔 일부러 시간과 공간을 내야 하지만 어느 정도 지나면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기도의 순간이 된다. 해서 일상 영성이다. 적어도 반년 동안은 이런 습관이 몸에 배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굳이 남의 잔소리를 듣지 않고도 혼자 추구할 수 있는 내적 힘이 생긴다.

안타깝게도 영성이 경제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어떤 상태에서든 불안과 걱정이 자신을 사로잡는 것을 막아 주어 다른 대안들을 쉬 찾게 해 준다. 일례로 부처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 세상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관점만 바뀌었을 뿐이다. 이처럼 당분간은 이렇게 보는 눈이 달라진 상태로 살게 된다.

이리 살다보면 아마 머지않아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통합 생태론에 이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되니 더 미루지 말고 당장 작은 실천이라도 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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