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어른들의 꾸짖음. 그들의 시선

“그래도 이만하면 얼마나 먹고 살기 좋은 세상이야. 우리 때는 얼마나 힘들었다고. 요즘 젊은 애들은 노력도 안 하면서 불평이 먼저야. 우리 때의 반도 노력 안 하면서 이게 문제다 저게 문제다 따지기만 한다고. 다 경험인데 그 나이에 누리려고 하는 게 너무 많아.”

결국 나의 비판 끝에 돌아오는 어른들의 결론은 바로 이거였다. 모든 어른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기득권의 대답이랄까.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을 결코 놓지 않으려는 이룬 자들의 관점이랄까. 23살 대학생, 특히 이 사회에 바라는 것도 많고 바뀌어야 할 게 많다고 느끼는,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느끼는 청년으로서의 내 이상과 포부가 몇몇 어른들에게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졌달까. 그때마다 나는 우리 세대가 얼마나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말해야 했다. 우리가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요? 우리가 얼마나 숨막히는 청년기를 보내고 있는지 아세요? 노력은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타고난 장벽을 극복할 수 없다고요!

비현실적 여행기

그 외침의 연장이거나, 어떻게든 내 이상(나조차도 그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는)을 실현해 보려는 노력이 고등학교 졸업 뒤 22살까지의 삶이었다. 그렇게 3학년을 마쳤고, 오랫동안 꿈꿔 왔던 여행을 떠나기 위해 휴학 신청을 했다. 고향 집에 내려와 그간의 내 사회와는 단절된 채로 6개월 동안 열심히 일했다. 식당 아르바이트, 과외, 학원 아르바이트 등 주말 없이 일했다.

그렇게 10월 초에 꿈에 그리던 여행을 떠났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4개월씩이나 여행을 가는 게 불가능하지 싶지만, 지난 6개월간 확신하게 된 것이 있다면 ‘진심으로 염원하다 보면 어떻게든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적은 돈으로 오래 여행하는 방법을 알아보려고 도서관도 자주 들락거렸고 거의 매일 밤 이것저것 검색을 했다. 싼 비행기 표를 끊으려고 이틀 밤을 새다시피 하기도 했다. 소문을 들은 친척들이 십시일반 모아 여비를 지원해 주셨고, 그렇게 가을이 절정으로 익어갈 무렵 무사히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 영화 "빨간 머리 앤"에 나오는 앤 셜리.(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캐나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 머리 앤’을 사랑했다. 앤 이야기를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언제나 희망차고 상상력이 가득했던 그 고아 소녀는 참 사랑스러웠다. 앤을 만나기 위해 캐나다에 왔다니까 입국 심사대에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튼 내 상상보다 훨씬 친숙하고 날씨도 춥지 않은 캐나다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온 지 어느덧 한 달이다. 앤의 녹색 지붕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카우치서핑으로 무려 3주간 무료로 숙박을 했다. 카우치서핑(Couchsurfing)이란 couch(소파)와 surf(찾다)의 합성어로 세상의 모든 소파들을 찾아 신세를 지는, 다양한 문화와 사람 간의 교류를 격려하는 훌륭한 철학이 담긴 커뮤니티다. 머나먼 아시아에서 자기네 나라 소설을 사랑하는 한 여학생이 앤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니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먼 친척이라고 하는 한 아주머니와 하루 종일 드라이브를 했고, 근처에 사는 노부부에게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아 전통 캐나다 가정식을 체험하기도 했다. 나의 카우치서퍼는 인심 좋은 아저씨였는데 카우치서핑의 철학이 마음에 들고, 여러 나라 사람과 교류하는 게 즐겁기도 해서 그간 50명이 넘는 여행자들에게 아늑한 집을 제공했다고 한다. 하루하루가 신기했고 꿈 같았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도 없었고 도움을 청하면 꼭 누군가가 기꺼이 도움을 베풀었다.

지금은 ‘마돈나 하우스’라는 온타리오 주의 한 가톨릭 공동체에서 공동 생활을 하고 있다. 규칙적인 생활과 기도, 자연친화적인 노동,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들로 가득한 곳이다. 여기에는 돈이라는 개념이 없다. 인터넷도 전자기기도 없다. 샤워는 일주일에 한 번만 할 수 있다. 하지만 ‘전부’ 있다. 우리는 지금 서로의 얼굴에서 참 행복을 읽을 수 있다.

헬조선 말고, 그냥 내 나라 한국으로 돌아갈 거다

이렇게 내가 꿈속을 헤엄치는 동안 내 나라 한국에선 여전히 하루하루가 매일 지나고 있었다. 친구들은 학교 생활하느라 바빴고 눈살 찌푸려지는 뉴스도 계속 올라왔다. 어느 순간은 겁이 났다. 이 꿈에 너무 취한 나머지 돌아가서 현실을 살아가지 못할까 봐. 안 그래도 나는 어려서부터 비현실적인 아이였다. 부모님은 나의 비현실성을 걱정했고, 나도 그 점을 잘 알았기에 누구보다도 현실적인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 왔다. 그래서인지 여행 내내 지금도 열심히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는 친구들에게 미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오랜만에 연락하게 된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헬조선에 뭐하러 돌아 와, 그냥 거기서 살 방법을 궁리해 봐”

헬조선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족이 모욕을 당한 듯 기분이 나빴다. 자꾸만 헬조선 헬조선 거리며 자포자기 상태인 것이 싫었다. 자조적이기만 했다. 그저 혐오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친구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안다. 나도 그랬다. 나보고 터무니없는 것을 바라지 말라는 어른들에게, 내 꿈이 왜 당신들에게는 터무니없게 여겨지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려다 보니 결국은 내가 헬조선에 살고 있다는 것이 결론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간의 내 삶과 내 사회에서 한 발 물러서서 잠시나마 관조할 수 있는 입장이 되니 내가 얼마나 희망의 힘을 몰랐는가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 스스로를 비현실적이라고 다그치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하지만 꿈꾸는 것이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살기 힘들다는 때일수록 꿈 꿔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에너지의 이름은 ‘희망’이기 때문이다. 희망 없는 비판은 힘이 없다. 희망 없는 분투노력은 나를 지치게 할 뿐이다.

헬조선은 희망이 없다. 나는 헬조선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동시에 같은 땅 같은 사회에서 헬조선을 살고 있지 않은 사람도 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다. 가슴 속에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꿈을 품고 있는 사람. 결국 세상은 그 사람들에 의해 변해 가는 것이다. 본 적 없는 세상을 그리워하는 이들에 의해서 조금씩이나마 바뀌는 것이다. 금수저니 흙수저니 애초에 시작점이 달랐다며 헬조선을 운운하는 게 대체 어떤 에너지를 주는가. 이제 그만 자포자기 해야 하지 않을까. 바보가 돼야 한단 말이다. 바보처럼 꿈꾸고 바보처럼 희망을 가지는 것만이 헬조선을 살지 않을 방법이다. 이것은 그만 현실에 만족하라는 기득권들의 목소리와는 분명 다르다. 순응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언제나 가슴속에 품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매일 꿈꾸며 살아도 될 거라는 용기

고아 소녀 앤은 결국 원하는 공부를 마칠 수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뤘으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으로 삶을 살아갔다. 어떤 드라마틱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시대가 특히 풍족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꿈꿨다. 어떤 사람들은 꿈꾸는 그녀를 비웃기도 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꿈을 이루도록 기꺼이 도왔다. 그리고 그녀는 늘 그녀 자신을 믿었다.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어느덧 그녀의 인생은 지구 위 수많은 이들의 롤모델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서 졸업하고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다니까 한 캐나다인이 말했다.

“그렇게 취직하는 게 어려우면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모아 보는 것은 어때? 기술의 발전 덕분에 너는 얼마든지 스스로 방송국을 만들 수 있어!”

그의 말에 말없이 웃으며 ‘넌 한국을 참 모르는구나. 진짜 이상적이네’라고 생각했던 내 모습을 반성했다. ‘Why not?’ 꿈조차 꾸지 않으면 확률은 0이다. 나의 추상성을, 비현실성을 사랑하기로 했다. 용기를 갖기로 했다. 매일 꿈속을 살아도 괜찮을 것이라는 용기. 희망을 말하는 언론인이 되고 싶다. 희망의 힘을 전하는 사람. 한국의 빨간 머리 앤이 되고 싶다.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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