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아쉬람 순례를 다녀오다-3]

 

▲ 간디 유해 화장한 추모공원

간디 아쉬람에서 만난 사람, 말띠

간디 아쉬람 공동체 일원인 말띠와의 간담회에서 강하게 느낀 것은 그녀의 부드러운 당당함이었다. 자그마한 마른 체구의 말띠는 시종일관 상냥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아쉬람에 오곤 했다. 간디맨인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스물네 살의 나이에 자연스럽게 아쉬람에 들어와 머물게 되었고 10년째 살고 있으며 행복하다. 간디 아쉬람은 현재 일곱 명의 공동체원이 운영을 분담하여 꾸려 가고 있다. 봉사자로서 단기간 머물 수도 있고 누구든지 공동체에 들어와 함께 할 수 있으며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 나는 간디와 늘 함께 한다. 그 분이 지금 여기 계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 하면서 일한다."

그녀의 나이는 서른다섯 살이다. 어찌 보면 철없을 나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매일 새벽 4시경부터 밤늦게 까지 일하고 지금 우리 앞에 앉아 침착하게 신념에 찬 소신을 말하고 있다. 그 자리에는 미소가 예쁜 아가씨와 그 아버지도 함께 참석했는데 말띠가 그랬던 것처럼 부녀가 함께 아쉬람에 순례 온 사람들이었다. 간디를 따르려는 그 열정이 존경스러웠다. 그들의 머무름이 스승을 닮아 정녕 진리에 이르는 깨달음이기를 바란다.

우리의 버스는 낙푸르를 향해 4시간을 달려 왔으며 늦은 점심을 2시가 넘은 시각에 먹고 다시 달려가고 있다. 인도에는 인도(사람이 다니는)가 없다. 중앙차선도 없다. 물론 대도시는 다르겠지만, 교통의 혼잡은 간담이 서늘하리만큼 아슬아슬 곡예수준이다. 분명 마주 보고 달려드는 차를 보았는데, 휴! 싸악 피해선 제 갈 길로 가고 있다.

▲ 간디 아쉬람

낙푸르로 가는 버스

버스로 이동할 때면 묵주기도를 바치곤 하는데, 자발적으로 앞좌석에 앉은 사람이 주송을 하고 좌우 교송으로 바쳤으며 성모찬송으로 마쳤다. 네다섯 시간씩 이동하다 보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함께 성가를 생각나는 대로 이어 부르기도 하고, 좌우로 나누어 편을 짜서 동요를 이어 부르기도 하고, 끝말잇기도 했다.
버스의 창밖으로 펼쳐진 끝없는 평야에는 보리인지 밀인지 모를 곡식이 짙은 초록빛으로 자라고 있었다. 델리나 아그라 쪽에서 많이 보이던 노란 유채꽃과 볏짚을 쌓아 놓은 낟가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으나 하얗게 꽃을 피운 목화밭이 자주 눈에 띄었다. 들판에서 한가로이 방목되는 흰색의 얼룩무늬가 귀여운 염소 떼와 어린 목동들이 보이고, 소떼가 지나가기도 하고 돼지도 간간이 보였다.

울창한 가로수 길을 지나기도 했는데, 우람한 나무줄기 아래로 뿌리가 뻗듯이 치렁치렁 엉킨 실타래처럼 늘어진 것이 신기했다. 우리들이 지루할라치면, 이 신부님이 끝없는 이야기를 펼치시며 웃기곤 하셨다. 지나가는 원숭이를 보고는 "원숭이 엉덩이는 빨게, 왜 빨간지 아세요? 그냥 빨게. 다아 빨게. 엉덩이 두 쪽이 다 빨게"로 시작해서 뱃살이 아플 정도로 웃게 해 주셨다. 이 신부님은 사회복지시설 관장님이시다. 어려운 사람들, 힘없는 노인들을 만나 친근하게 다가 가 웃게 만드는 그분만의 노하우일 것이다.

▲ 아쉬람 순례 숙소에서 가진 매일미사

씨알 아쉬람

씨알 아쉬람은 한국인이 인도에 세운 첫 번째 아쉬람이라고 한다. 단층으로 합숙이 가능한 두 개의 넓은 기도방과 사무실, 화장실, 세탁실 등 반듯하게 잘 세워진 씨알 아쉬람은 텅 빈 채로 있었다. 길 건너편에 성당 같은 것이 있어 달려가 보았다. 성심화가 걸려 있었는데 빛이 바래어 그림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제대도 찌그러진 탁자를 갖다 놓은 듯 어설프기만 하고 그 위에 가느다란 나무 십자가가 하나 비스듬하게 걸려 있었다. 아, 내 집에 있는 성물로 장식을 해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순간 이곳에 계시는 하느님을 생각했다. 주님은 이들을 탓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들의 생활을 잘 아시니까, 인도에서는 정부의 정책으로 천주교, 성공회, 개신교가 모두 ‘그리스도교’라는 하나의 재단으로 묶여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의 교구처럼 각 지부가 있고 미사를(예배도) 같이 한다고 한다.

얼핏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그들은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없고 그저 주일에 10여명이 모인다고 한다. 영국이 350년 동안 인도를 지배했으나, 그들에게 그리스도교는 뿌리 내리지 못했다. 반항하지 않았으나 그들은 아무것도 버리지 않은 것이다. 350년 동안 속으로 자기 것을 지킨다는 것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36년의 세월을 일제 압제에서 견디어낸 우리나라와 무엇이 다른 걸까, 그들이 투철한 민족주의자들이라서 가능했을까?

밖으로 나오니 성당 건물 한편에 빗대어 지은 관리인 숙소 같아 보이는 곳에 아이들이 몇 명 서서 바라보고 있다. 국악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베드로는 마음이 따뜻한 청소년이다. 만나는 아이들에게 주려고 초콜릿과 사탕과 볼펜 등을 준비해 왔다. 아이들은 얼른 손을 내밀지 못했으나 받아 들고는 수줍게 좋아했다.

배불리 먹은 저녁

저녁 때 쯤에야 낙푸르 씨알 아쉬람의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미간에 붉은 칠을 해 주는 환영과 기다리다가 시들어버린 듯한 꽃(거베라)을 세 송이씩 받았다. 그곳은 오아시스를 연상케 할 만큼 푸르른 야자수와 과일나무들과 꽃들로 잘 가꾸어졌으며 드물게 보는 육중한 3층 건축물 안으로 들어서니 새장 안의 앵무새와 다른 회색빛 큰새가 요란스럽게 울어 댔다.

바깥에는 타조 같이 생긴 커다란 새 두 마리를 울안에서 키우고 있었고, 텃밭에는 우리나라 토종닭 같은 잘 생긴 닭들이 뛰 놀고 있었으며, 오리 떼도 도랑물에서 유유히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땅거미가 내린 시간이지만, 심야전기라서 그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컴컴한 속에서 흙먼지를 씻기 위해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하느라 한바탕 부산을 떨었다,

모여 앉은 저녁 식탁에서 모처럼 준비된 잘 익은 김치를 먹을 수 있어서 기뻤다. 인도에서 배추는 못 보았으나 손가락 두 개 넓이의 기다란(15~30센티) 무가 많다. 이것을 달랑무 담듯 쪼개고 잘라서 김치를 담그는 것이다. 마늘과 고춧가루가 있으며 마늘잎 같은 파도 있다. 돼지고기를 바베큐처럼 불에 구워 먹고, 엠마 씨와 자매들이 만든 닭도리탕을 맛있게 먹었다. 후르르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풀기 없는 밥만 먹다가 모처럼 육식으로 든든하게 포식을 했다. 누군가 말했다. "우리 이렇게 잘 먹어도 되는 거야?" "글쎄, 미안하네" 지금 굶주린 그 누군가에게 정말 미안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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