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숙 수녀에게 길을 묻다

강정마을, 순화동과 광화문에 가면 젊은 사제들과 더불어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 늘 수녀들이 있다. 영적성장과 사회적 실천이 둘이 아니라는 말을 새기며 때로는 모성적인 품으로 때로는 다부진 여성으로 현장을 지키는 분들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자주 마주치는 얼굴 가운데 한 분이 서울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소희숙 스텔라 수녀다. 이 수녀에게 프란치스코 교종이 꿈꾸는 교회에 대해 길을 물었다.


요즘 가장 급진적인 분은 프란치스코 교종 같아요. 그분이 바라시는 바가 뭘까요?

프란치스코 교종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즉 하느님나라를 이 땅위에 건설하는 것을 본인의 사명으로 삼으신 것 같아요. 성경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께서는 평화로운 세상, 사랑과 정의가 넘치는 세상을 바라셨다는 걸 알 수 있잖아요. 보통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기도를 올릴 때 마음의 평화를 바라지만, 교종님은 세상의 평화를 바라시는 것 같아요. 세상이 평화로워야 사실 내 마음도 정말로 평화로워질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성경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그 이웃이 확장되면 사회가 되는 것이고, 결국 사회의 공동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정의구현이고 그것이 곧 이웃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보세요. 하느님께서 처음 만난 모세에게 주신 명령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하는 백성들을 해방시키라는 것이었잖아요? 개인적인 구원에 앞서 공동체의 구원을 바라신 거죠. 교종님의 가르침과 행보를 보면,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사랑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평화의 하느님나라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시는 것 같아요.

▲ 예수는 기득권자들이 제거해야 할 만큼 위험한 혁명가였다. ⓒ한상봉

그럼 예수님도 그런 사회구원을 바라셨다는 말일 텐데요.

당연하죠. 구약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줄곧 사회공동체의 구원을 바라셨는데, 유랑민 유대인이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벌써 하느님의 뜻이 심각하게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결국 당시 기득권층인 정치권력과 제사장들이 제 입맛에 맞는 전통과 규율을 만들어서 하느님의 계명을 대체해 버리잖아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 오신 분! 그 분은 수백 년에 걸쳐 내려오는 그 전통을 타파하고 다시 하느님의 뜻과 의지로 채워지는 사회건설을 위해 세상에 오신 분. 그 목적이 사회구원이죠. 예수님은 사회공동체의 구원을 위하여 평생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의 내용을 가르치고 그 나라를 세우려 노력하시다가 돌아가신 분이죠.


하느님나라에 대한 생각이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이네요.

지당한 말씀이죠.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새 술은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구절이 있잖아요? 헌 가죽부대에 새 술을 담으면 부대가 터져 버려서 부대도, 새 술도 못 쓰게 된다는 말씀! 여기서 새 술은 사랑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하느님나라를 말하는 게 아닐까요? 만일 하느님나라가 건설되어야 하는 곳이 헌 가죽부대 같은 이 사회라면, 이런 묵은 것은 거둬내야 한다는 말이죠. 이미 하느님의 뜻이 뿌리깊이 왜곡되어 있는 기존 사회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하느님나라가 이 땅위에 세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이겠죠. 이렇게 이해가 되면 당연히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를 담을 새 가죽부대를 만드시려 노력하다가 제거 당하신 분이죠. 예수님은 단순한 사회개혁가는 아닐 겁니다. 만약 예수님이 개혁가 정도였다면 당시 권력가들이 예수님을 죽이기까지야 했겠어요?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이죠.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위험수위를 넘어섰던 거죠. 예수님은 그 당시 기득권자들에겐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위험한 사회혁명가가 아니었을까요?


요즘 교회는 하느님나라보다 사랑을 더 강조하고 있지는 않나요?

최근에 제가 30일 성서통독 피정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성경 전체를 보았는데, 예수님처럼 ‘하느님나라’라는 표현을 직접 들고 나온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인 것 같더군요. 거의 모든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공정와 정의, 자비와 사랑’을 이야기 했지만 직접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언급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 사람들에겐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참으로 신선하고도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그 제자들은 하느님나라보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집중적으로 선포합니다. 부활사건에 압도당한 것이겠죠. 부활사건을 이야기 하려니 자연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강조하게 되고요.

70년 유대전쟁 이후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고 난 뒤에 주변국가로 뿔뿔이 흩어졌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형성하면서 강조한 것이 ‘사랑과 자선’이었던 것 같아요. 비교적 나중에 집필된 요한복음서는 유난히 ‘사랑’을 강조합니다. 서로 돕고 의지하고 배려해야 믿음의 공동체가 뿌리를 내릴 수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후로 하느님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으로 대체되는 경향이 강하고, 대신에 ‘사랑’이 강조되죠.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국교화 되면서 개인구원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자선 중심의 사랑만 교회에서 강조하게 된 것 같아요. 결국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기쁜소식,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생생하고 힘이 넘치던 신선한 바람이 잦아들었어요. 공정과 정의 대신에 사랑과 자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 쪽으로 교회가 흘러간 거죠. 이 과정에서 예수님이 직접 선포하신 복음이 희석되고 윤리도덕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나 할까요~?


사회교리에서 ‘정의로운 사랑’을 언급한 것은 그래도 다행이네요.

사실, 사랑과 정의는 다른 말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한번도 ‘자기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다 이웃사랑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웃’의 개념 이해에 차이가 있더라고요. 나의 이웃과 너의 이웃이 모이고 모인 큰 덩어리를 ‘사회’라고 하죠. 이 사회, 저 사회를 총체적으로 일컬어 국가라고 하고요. ‘사랑’이 개인과 개인 사이의 올바른 질서라면 정의는 사회와 사회, 국가와 국가 사이의 올바른 질서라고 볼 수 있죠. 결국 이웃사랑이 그대로 사회정의 실현인 거죠. ‘사회’를 보지 않고 자꾸 ‘이웃’만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큰 이웃이 있다는 것을 보지 않기 때문일 거예요. 입으로는 인류구원을 말하지만 마음과 행동은 늘 나와 내 가족과 몇몇 주변 사람들의 구원에 머물고 말아요. 이게 문젭니다.

요즘 본당에서 ‘사회정의’를 말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 초기에는 정의와 자선이 하나의 같은 단어였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조철수 박사의 <예수평전>에서는 히브리어의 쯔다카(자선)는 쩨데크(정의)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하더군요. 자선은 의로운 행위란 뜻으로, 남을 돕는 행동은 의로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거죠. 사실 자선과 정의를 분리시켜 ‘자선’만 강조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선사업에만 몰두하는 교회는 한계가 있는 거죠. 예수님께서 선포한 기쁜소식은 약자 구제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하느님나라의 사회질서를 세우자는 거니까요. 아픈 사람 치료해 주고, 배고픈 사람 양식 나눠주는 차원을 뛰어넘어, 더 이상 슬픔과 고통, 가난과 비참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거니까요. 이것은 희년의 의미와 상통하고, 마니피캇에 나오는 이야기나 회당에서 예수님이 읽으신 이사야 예언서 내용이 다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죠.

▲ 예수처럼 목숨을 걸만한 일을 해야 그분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한상봉

예수님이 바라던 교회를 교종께서도 바라신다는 이야기인가요?

우리 현실교회가 내세를 희망의 빌미로 삼아 기도를 강조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자선사업에만 몰두하는 것을 교종님이 문제 삼으시는 거죠. 이런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고 절박하게 여기신 분이 그분 아닙니까?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 시대의 참된 예언자이시죠. 경제독재로 가난한 사람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무관심의 세계화’를 말씀하시면서 교회도 예외가 아니라고 말씀 하시죠. 저는 프란치스코 교종을 보면 예수님 보는 것 같아요.


수녀님은 예수님을 어떤 분이시라고 생각하나요?

예수님이요? 멋진 분! 당당하고 거침이 없고, 인간사를 꿰뚫고 계시고, 하느님의 마음을 확실히 아시는 분. 탁월한 논쟁가이며 동시에 가난한 이와 미소한 이들에 대하여 한없는 연민을 가지신 분. 하느님나라의 기쁜소식을 선포하시고 가난하고 억눌리고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신 분! 끝이 없어요. 복음서에서는 단 한마디로 예수님을 표현한 말이 있어요. 엠마오로 가는 제자 중 한 사람이, “그분은 행동과 말씀에 힘이 넘친 예언자셨다.”라고 말해요. 행동하시는 분, 가르치시는 분, 힘이 있으신 분, 그리고 예언자이셨다는 거죠.

사족을 달자면,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선택한 사람, 당신 말씀을 맡긴 사람, 그래서 예언자는 하느님 말씀의 안경을 끼고 시대의 징표를 읽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뜻, 사랑과 정의를 선포하고, 이에 어긋나는 불의는 불의라고 외치는 사람이죠. 하느님께 돌아오도록 회개를 촉구하고 그 시대의 하느님의 보이는 징표, 횃불이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르친 대로 힘 있게 행동하셨던 예언자였습니다. 그분은 특별히 성직자들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주교님과 사제들이 신앙인의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그분들은 우리의 모델이고 모델이어야 합니다. 온 생애를 바쳐 스승 예수를 따르겠다고 교회에서 공적으로 서원하신 분들이니까요. 그분들은 예수님에 대해 가장 많이 공부하고, 가장 많이 기도하고, 가장 철저하게 스승처럼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성별된 그분들이 거룩하게 살도록 신자들이 아낌없이 모든 뒷바라지 하는 거죠. 그분들이 우리처럼 살지 말고 예수님처럼 살라고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목자처럼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분들이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고 계시는지 잘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걸 알 수 없으니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울 수가 없지요.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니까 예수님처럼 살면서 신자들의 모델이 되어야 할 그분이 어떻게 살고 계신지 알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게 답답해요.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예. 필요하죠.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한 복음이 야고보 서한인데,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은 끊임없이 행동을 강조하셨어요.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동하는 사람이 곧 내 어머니이며 형제들”이라고까지 하셨죠. 우리 모두가 행동하는 신앙인이면 좋겠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 알아요. 알고 있지만 욕심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먹고 살기 위해 사기도 치고, 양심을 버릴 유혹도 많이 있어서 예수님 말씀대로 살기가 힘든 거죠. 그래서 길잡이, 등대, 빛이 필요합니다. 격려하고 채찍질하고 빛을 비추어주는 사람 말입니다.

이래저래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모델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들, 성직자들입니다. 이끌어주고, 받쳐주고, 누룩과 소금의 역할을 하시는 분들. 힘든 삶이기에 그들의 몫도 특별합니다. 그 몫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민수기 18장 20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아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땅에서 상속 재산을 가질 수 없다. 그들 사이에서 너에게 돌아갈 몫은 없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네가 받을 몫과 상속 재산은 바로 나다.”라고요. 그러니, 믿는 모든 이들이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이 시대에 하느님나라를 일구는 일꾼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신자들이 얼마나 신명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까요, 생각해 봅니다.


한상봉 기자 /  뜻밖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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