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이야기-1 ]


지난 4월 10일 <지금 여기>, “여성이 종교적으로 열등하다는 거짓말” 에서 백찬홍 선생은 여러 종교의 여성 지도자, 그리스도교의 힐데가르트와 아빌라의 성녀 예수의 데레사를 예로 들고 여성들의 종교적 탁월함을 재확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의 글을 맺고 있었다: “시효가 다 된 채 권력과 물질에 눈이 먼 가부장적인 종교를 대체하기 위해 위대한 영성과 지도력을 가진 여성이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야 시점이 온 것 같다. 그때를 간절히 기다려본다.”

백 선생의 혜안에 깊이 공감을 하면서도 그에 못지않은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스도교가 그 시작에서 여성인 마리아와 함께 시작되었음에도, 지금 우리에게 그 마리아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 성모 마리아는 여성인 우리네의 일상과 달리 그저 성스럽게만 살았고 우리와 아무런 공통분모가 없는 것인가? 그분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높은 천주의 어머니로 하늘에 계셔서 단지 애타는 인간들의 기도만을 중재할 뿐인가, 여전히 그분은 가톨릭교회의 어머니로 남아서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서 일치를 어렵게 하는 분이기 때문에 때로 한 곁에 비켜서서 그 존재를 감추고 있어야 하는가?

 

▲ 고통의 마리아

로마에서 아빌라의 성녀 예수의 데레사와 가르멜의 성녀 에디트 슈타인을 공부하고 마리아론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제 막 귀국했다 하면, 맙소사! 그 가부장적인 로마신학의 연장선에서 마리아신심을 강화하고 왔구나! 그것이 내가 받을 선입견이란 것은 이미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인 것 또한 부인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 마리아신심이란 것의 진실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왜곡되어왔는가를 밝혀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몫이란 것을 알고 있다.  그 밝혀진 진실을 나누는 것 또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함께 시작해야 할 것임을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그 첫번째 작업은 마리아에 관해 역사적 이해를 시도해보는 것이다. 네 가지나 되는 가톨릭 교회의 마리아 교의 이전에, 그를 역사적인 한 인물로 재조명하는 것은 그의 아들인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는 것과 함께하는 첫 작업이 될 것이다.

메시아 대망을 품은 처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면면히 살펴보면, 야훼와 계약을 맺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들뿐만 아니라, 그 아브라함의 계약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그의 아내와 딸들이 등장한다. 계약을 실현시킬 아들 이삭을 낳은 사라 (창세기21,1-8),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서 탈출을 이끌었던 예언자 미리암 (탈출 15,20), 판관시대의 지혜로운 여성판관 드보라 (판관 4,4-5), 기도를 통해 희망을 실현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사무엘상 1,9-20), 일곱아들을 격려한 마카베오 가문의 어머니 (마카베오하 7,1-42) 등등, 시온의 딸로 상징되는 유다의 처녀 미리암 (마리아)은 그 질곡의 역사을 살아낸 이스라엘의 딸이었고, 언젠가 메시아가 와서 제 2의 이집트 탈출에 비길 해방을 이룰 것이라고 희망하는 전통 안에서 살고 있었다.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 중에서 유다교의 전통과 그 영향력 아래 쓰여진 마태오 복음서 1장에는 예수의 족보가 나온다. 그런데 그 족보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성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는 다윗왕의 가문에 등장하여 오실 메시아의 혈연적 계보의 내막을 밝혀준다. 다말은 이복형제에게서 강간을 당했고, 라합은 이스라엘의 첩자들을 도와 자기가 살던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접대부였다. 룻은 죽은 남편의 가문을 잇기 위해 다른 남자를 통해 임신을 하였고, 밧세바는 남편을 살해한 다윗 왕의 아내가 되어 그의 아들을 낳아야 했다. 바로 그 여성들이 약속의 메시아 가문을 이루는 선조들에 있었다.

구약의 여성들과 다윗가문의 여성들이 바로 나자렛의 미리암(마리아)이 알고 있었던 이스라엘 어머니들의 역사였다. 다윗가문의 요셉과 약혼한 어린 처녀 역시 특별한 가문의 딸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의 전통 안에서 교육받은, 그래서 오실 메시아의 희망에서 무관할 수 없는 여성이었다. 아마도 그 오실 메시아를 낳을 어머니로 선택되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의 젊은 여성들이 품었을 희망이었을 것이다.

루가복음 1장에서 만나는 이 당돌한 처녀는 천사의 초대에 단번에 대답하지 않는 침착한 모습을 보인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약속의 실현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고, 주고받는 네번의 질문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그 초월자의 계획에 동참할 것을 약속한다. 그의 약혼자인 요셉의 가문에 내려오는 이 메시아의 약속은 구체적으로 자신의 임신에 결정권을 행사하는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서 실현된 것이었다.

복음서의 그 어디에도 이 나자렛의 처녀 미리암이 천사에게 대답하기 전에 누군가에게 자문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의 대답은 오시는 메시아를 품어 안는 그 오랜 약속을 실현시키는 자유로운 의지의 행동이었으며, 신의 부름에 대답하는 이 자유로운 인간의 응답에서 비로소 새로운 인간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이 가능했던 것이다.

아들의 죽음을 맞은 어머니

▲ 고통의 마리아

그의 응답으로 얻은 아들 예수와 그의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관해서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나자렛의 미리암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다 (루가 2, 19. 51). 그의 아들이 어른이 다 되도록 그를 메시아로 부를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예수는 서른이 넘자 회당에 나아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아픈 이들을 고쳐주기 시작했다.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떼지어 다니고, 각 지역에서 그에게 호응하는 사람들을 얻기 시작하고 지배계층의 비리를 공공연하게 비판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이어 이스라엘의 독립을 부추기고 로마제국에 맞서는 반정치적인 인물로 주목 받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일급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아주 짧은 기간 안에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약속을 믿고 있던 어머니는 어이없이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을 수 밖에 없었다.

억울하게 죽은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는 아직 젊은 어머니, 이것이 이 저녁 우리가 만나는 나자렛의 미리암, 고통의 어머니 마리아의 역사적인 모습이다. 오늘 예수가 처형당하는 것을 기억하는 이 금요일에 우리 앞에서 억울하게 죽은 아들을 끌어안고 멈출 수 없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힘없는 한 여성을 떠올려보자. 그가 바로 우리가 만나는 마리아의 첫번째 모습이다.

청계천 피복노조을 하며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산화한 아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군에 입대한 아들을 기다리다 의문사 통지서를 받아 들었던 어머니들, 또 오늘 용산에서 영정을 품에 안고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붙여 잡고 있는 여성들. 그 마지막을 넘어서고 절망에서 희망을 살려내는 여성들에게서 우리는 여전히 나자렛의 미리암, 우리와 비슷한 삶의 질곡에 얽혀있고, 그 고통과 피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시작하는 여성 마리아를 만난다.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었던 그 어머니에게서 약속을 향해 성실히 살아가는 한 인간을 만나고, 그 죽음에 꺾이지 않는 인간의 모진 희망을 다시 만난다.

그래서 부활이다. 죽음을 통과하는 생명의 힘이다.

- 2009. 4. 10 성 금요일에 최우혁 미리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