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삶의 흔적은 대지 위에 남는다.” 건축가 이일훈 선생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책에 나오는 글귀다. 십수 년 전에 귀농을 꿈꾸면서 노다지 땅을 물색하고 전국 사방각지를 떠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전남 영광에서 강원도 홍천까지. 결국 경북 상주에 잠시 머물다 안착한 곳이 전라도 무주였다. 무주 산골짜기에 터 잡고 살았던 6년, 200평 대지에 건평 25평의 농가주택에 살았지만, 온 산을 병풍처럼, 온밭을 앞마당처럼 누리며 살았던 세월이다. 비 그치면 밭 아래 흐르는 안개구름을 신선처럼 바라보았다. 물론 생활은 각박하고 힘겨웠지만 그래도 앞산에 우는 목탁새 소리를 듣는 호사도 누렸다. 귀농을 생각하며 늘 ‘공간’에 주목했지만 소유한 땅은 언제나 좁았다.

 ⓒ한상봉

이일훈 선생은 한 사람이 점유하는 공간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물었다. 땅을 밟는 발의 크기는 커야 30센티를 남지 않고 혼자 앉는 의자 폭은 아무리 넓어도 50센티, 건축가가 여러 사람이 다니는 복도의 너비를 계산할 때는 한 사람의 어깨 폭을 60센티로 보고 세 사람 몫의 180센티로 재거나 여유 있게 2미터 정도를 최적의 폭으로 삼는다 했다. 시설을 지을 때 넓으면 좋지만 경비가 많이 들고, 이 때문에 좁히고 싶지만 너무 좁으면 생활하기 힘드니 적절한 공간을 찾는다. 큰집을 ‘대궐 같다’고 하는데, 공간을 많이 차지할수록 계급이 높다는 뜻이다. 즉, 비효율적 공간이 넓어야 권위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대통령 집무실과 기업 사장실이 그러하다. 가난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차지하는 공간도 좁다. ‘입추의 여지가 없다’는 말에서, 이때 추는 송곳 추(錐)인데, 송곳 하나 꽂을 틈도 없다는 뜻이다. 쪽방에 사는 사람의 살림이 그러하다.

그러면 사람에게 필요한 적절한 공간의 크기는 어떠할까? 이 문제는 너무나 주관적이라서 한 마디로 단정하기 어렵다. 사람이 사는데 침실만 필요한 게 아니라 작업장도 필요하고 쉴 수 있는 거실이 넓어야 삶이 쾌적해진다. 그래서 저마다 살림집을 늘리기 위해 일 한다. 사글세에서 전세, 전세에서 제 집 장만하는데 생애의 수고를 다 바친다. 제집이 생기면 한 평이라도 더 넓히기 위해 애쓰는 게 사람이다. 집 크기를 보고 그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가늠하지만, 그 집에서 사는 사람들의 사람살이는 어떠한지 묻지 않는다. 고부간에 갈등은 없는지, 아이들이 부모를 존경하는지, 명색만 부부인 경우가 있는지 살피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집은 무엇일까? 청와대는 비록 계약기간이 정해진 대통령의 임시거처지만 무지막지한 넓이로 정치권력의 위대함을 상징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청와대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그곳에 사는 사람의 성정과 정치행위에 주목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 집이 아니다. 공간의 크기가 아니라 공간에 대한 사람의 감수성이다.

문득 공간을 생각할 때마다 ‘1평坪’에 대해 묵상한다. 1평은 3,3058㎡, 6자 사방이라고 하는데, 한 사람이 뒹굴거나 눕거나 움직이는 최소 넓이다. 사람이 죽어 묻히는데 한 평이면 족하고, 살아서 큰 대(大) 자로 누워 팔 벌린 사방 길이가 한 평이다. 여기에 생활방식을 고려해 한 평 한 평 더하다 보면, 최적의 넓이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개인에게 필요 이상의 공간을 제한하고, 공원처럼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개방적 공간을 늘여나가야 사회적 삶의 질이 높아진다. 이런 사회적 공간(open space)이 좁은 사회는 사람들에게 만원버스를 타고 흔들리며 일생을 살아가라고 강요하는 사회라고 이일훈 선생은 말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기쁨>에서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고 말했다. “공간을 우선시하는 것은 자신을 내세우는 권력의 공간을 독점하고 모든 것을 현재에 가두려는 무모한 시도”(223항)라는 것이다. 교종은 인간의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역사적 과정에 주목하고, 이를 위해 서로 연대하라고 요구했다. 그것은 곧 나의 공간을 줄이고, 우리들의 공간을 넓히면서 모두의 삶을 그 공간 안에서 환대하는 것이다.


한상봉 편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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