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인(小工人)을 만난 전순옥 인터뷰

머리끝이 희끗한 전순옥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을 만났다. 오빠 전태일이 분신했던 1970년, 그녀의 나이는 16세. 봉제공장 시다로 일하며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더불어 노동운동으로 청춘을 보낸 여인이다. 1989년 노동운동의 국제연대를 위해 영국유학을 떠나 워릭대학교에서 노동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그의 논문은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They are not machine)>였다. 2001년 귀국해 성공회대 교수직을 맡았으나 1년 만에 고향 같은 동대문 창신동으로 돌아가 참여성노동복지터, 수다공방, ‘참 신나는 옷’이라는 사회적 기업 등을 만들었다. 2012년 비례대표로 국회위원이 되어 ‘도시소공인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창신동과 성수동 등 어느 골목에서 수십 년간 미싱을 타며, 가죽을 무두질하며 손기술로 한 시대를 꿰매온 장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소공인(小工人)>(뿌리와 이파리, 2015)이란 책을 발간했다. ‘소상공인’이란 말은 있어도 손노동 기술자를 ‘소공인’이라고 부른 이는 전순옥이 처음이다.

▲ 소공인, 손기술자의 재발견은 전순옥 의원의 사랑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게 한다. ⓒ한상봉

<소공인> 책을 내게 된 이유?

영국에서 논문 쓰려고 10년 만에 잠깐 한국에 돌아왔을 때 각계각층 사람을 150명 정도 만났는데, 1970년대에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아직도 달라진 게 없더라고요. 세상은 많이 변했는데, 잘 사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말입니다. 그때 이런 질문이 생기더라고요. 왜 이 사람들은 예전처럼 그렇게 살까? 유럽에서는 기술자들이 대접받고 사는데, 거기서 명품도 나오고 장인도 나오는데, 우리는 왜 그런 게 없을까? 사람들은 여전히 숨어 살고, 공장 구석에 콕 박혀서 일만 하고 있었죠. 이 사람들이 사실은 진주 같은 사람들인데, 다만 진흙 속에 묻혀 있을 뿐인데, 이 진주를 잘 꿰면 새로운 보석으로 탄생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세상에 나온 게 <소공인> 이 책입니다.


사람들은 시중에 나오는 옷들이 다 메이디 인 차이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창신동 같은 데는 아직도 미싱 밟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 우리나라는 대량생산 시스템이 베트남과 중국, 인도네시아 등으로 나가서, 예전에 봉제로 먹고살던 사람들이 길거리에 버려진 사람들이 되었어요. 수십 년 씩 기술자 생활을 해 온 사람들이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도시에서는 몇 사람씩 소공장에 모여 일을 하는 거죠. 이 사람들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해요. 이 분들은 자본주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가치 있는 기술의 보유자들입니다. 이분들은 오랫동안 공순이, 공돌이로 대우받았지만, 다른 나라에선 20년 이상이면 마이스터, 30년 이상이면 명장 대접을 받아요. 우리나라에는 40년 이상 기술을 익힌 분들도 많아요, 한복 짓는 사람부터 인쇄공까지. 이 사람들이야말로 소중한 경제의 원천들인데 안타깝더라고요.

이런 소공인들의 생태계를 복원시켜 주는 게 제 소망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만든 특별법을 통해서 이분들이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고, 훈련시스템도 갖추고, 동업종 공장이 50개 이상 있으면 ‘도시형소공인 집적지구’로 지정해 지원센터도 만들게 된 것입니다. 공동마케팅 시스템도 만들려고 하는데, 생산만 하는 게 아니라 공동매장을 만들어 판매까지 하도록 돕는 거지요. 그 일환으로 동대문에 ‘르돔’이라는 의류·잡화 쇼룸도 만들었어요. 문제는 이 분야에 젊은이들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예전부터 일하던 분들은 열악한 공장 환경을 개선할 생각을 못해요. 그동안 살아온 대로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거죠. 그렇지만 청년들이 여기에 참여하려면 공장도 사무실처럼 깨끗하게 정돈된 분위기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젊은이들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내는 창조적인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 같아요. 손노동이라는 게 정말 재미있거든요.
 

▲ <소공인>, 전순옥-권은정 지음, 뿌리와 이파리, 2015.
가톨릭에서는 노동이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계승하는 거룩한 일이라고 하는데, 이런 소공장은 처음부터 완제품이 나올 때까지 모든 공정을 보니까 성취감도 많이 느낄 것 같아요.

<전태일 평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무실 노동자는 지식노동만 하지만, 이 소공인들은 지식과 육체노동이 다 필요하니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성경에서도 네 손의 수고로 먹고 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사회의 문제는 사람들이 내 손으로 아무리 노동을 해도 제대로 먹고 살기 힘들다는 거죠. 욕심이 아주 사나운 유능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는 구조가 자본주의 사회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포도밭 주인의 비유처럼 아침에 온 사람이나 저녁에 온 사람이나 똑같이 임금을 지불하잖아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 없이 돈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먼저 무엇이든 일을 시키고서 줘요. 노동은 사람들에게 자기 존중심을 갖게 합니다. 그 사람이 어렵다고 길거리에서 막 돈을 주면 그 사람은 비열해지거나 비굴해기 쉽죠. 자존감이 사라지는 거죠. 그러니 노동의 대가로 돈을 주는 것이 그 사람에게 노동의 신성함을 일깨우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노동이 인간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준다는 말이 참 좋네요.

저희 봉제아카데미에서 강사 생활을 하고 있는 43년 경력의 김도영 씨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완전히 지친 상태에서 돌파구를 찾아서 저를 찾아왔던 봉제의 장인인데요, 지금은 공예를 배운 딸과 함께 자기 이름을 딴 조그만 공장을 하고 있어요. 그분은 요즘 “내 숨결과 미싱이 한 호흡으로 흘러갈 때, 더 없이 평온이 찾아온다.”고 하죠. 미싱을 하는 동안 영혼이 가장 평화롭다는 것인데요, 처음에 저를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구두 장인 유홍식이나 토털 의류기술자 한상민 씨 등이 다 그런 셈이죠.

저는 소공인들이 참 신나는 일터에서 참 신나는 노동을 하며, 나이 먹는 것이 더 이상 불안하거나 두려운 일이 아니라 자기 삶의 완성형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를 만들고 싶어요. 사람들은 이런 일이 다 더럽고 위험한 기피직종이라고 여기는데, 노동이 고역스런 밥벌이가 아니라 ‘3L’ 즉 배우고(learn) 자유로워지고(liberating) 삶을 바꾸는(life-changing)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술이 좋아서 더 배우고 싶어하고 그래서 더 훌륭한 기술자가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노동의 노예가 아니라 자기 노동의 주인이 되니까 자유롭게 돼요. 우리가 ‘노동해방’이라는 말을 쓰지만, 노동을 안 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죠. 내가 자유롭게 노동을 하게 된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재미있는 일이 생겨요. 장인으로 기술자로 자존감이 생기면 그만큼 자유로워지고, 그러면 삶의 질이 바뀌게 됩니다. 예전과 다르게 살게 된다는 건데, 이건 돈 많이 벌게 된다는 말과 달라요. 삼성의 이건희나 롯데의 신격호 같은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아져도 가족들이 원수가 되잖아요. 돈이 많으면 편리해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삶의 질이 달라지지는 않아요. 새로운 가치관을 갖고 스스로 자기가 하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면, 사실 먹고 사는 것도 더 나아져요. 하기 싫은 일은 더 배우려고 하지 않고, 그래서 삶에 변화가 없으면 오히려 먹고 살기도 더 힘들어져요. 일이 즐거워지면 먹고 사는 것도 쉬워지고 세상 보는 관점도 달라지죠. 이게 진짜 새로운 삶이죠. 김도영 씨 같은 분을 보면 그런 변화가 가능하구나, 현실적으로 보여요.

▲ 전태일은 노동자는 기게가 아니라 했다. 누이동생 전순옥은 그런 사회를 제도로 떠받치고 싶어 한다. ⓒ한상봉

이런 변화를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제가 시도해 본 것은 이력서 쓰기와 패션쇼 같은 겁니다. 이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자존감을 회복하는 겁니다. 나와 내 기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본인이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2006년에 제1회 수다공방 패션쇼를 열었어요. 처음엔 다들 못한다고 난리더군요. 패션쇼 하면 신문방송에 다 나오고, 그러면 자식들이며 사돈들까지 내가 미싱사라는 걸 다 알게 된다고 펄쩍 뛰는 거죠. 그래서 유방암 환자들이 했던 ‘핑크리본 패션쇼’ 기사를 들려주며, 그 사람들처럼 우리도 숨어살던 둥지를 깨고 나와야 한다고 설득했죠. 우리가 다 열심히 자기 기술로 일해서 아이들 잘 길렀는데, 얼마나 자랑스러운 엄마들이냐고, 그게 왜 나쁘냐고 설득했죠. 결국 여기 기술자들이 직접 지은 옷을 본인도 입고 사회 각계각층에서 초대한 유명인사들도 입혀서 패션쇼를 했어요. 그들이 워킹을 하면서 다들 눈물바다가 되고 세례 받은 것처럼 뒤집어졌어요. 결혼하고 처음으로 남편한테 꽃다발을 받아본 사람도 감격하고, 다음에는 딸과 함께 무대에 서겠다는 사람도 나왔어요.

다음에는 2009년에 이력서 쓰기를 했는데, 다들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했다고 하면서 기술자 경력을 3~4년씩 깎아먹는 게 보통이죠. 그래서 솔직히 다 쓰라고 했어요. 몇 살에 처음 공장에 들어가서 누구 밑에서 시다 생활을 했고, 미싱은 어디서 얼마나 배웠고, 다림질은 어떻고 세세하게 낱낱이 쓰라고 한 거죠. 기술자에게 학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기술을 배우고 익힌 이력이 중요한 거죠. 이 분야에서 장인이라는 게 그런 거죠. 이 당시에도 학력을 속이는 사람이 있었는데, 2010년 강남의 유명학원에서 학원 설명회를 하는 걸 벤치마킹해서 봉제아카데미 강사들에게 신청자들 앞에서 자기 기술을 소개하라고 했어요. 뭘 잘 할 수 있고, 뭘 가르칠 수 있는지 말이죠. 그 말을 듣고 신청한 사람들은 다 자기 학생이 되는 거죠. 그런데 어느 날 한상민 선생이 설명회 하면서 저는 초등학교 나와서 이 기술을 30 몇 년 했다고 고백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객석에서 듣다가 제가 눈물이 다 쏟아지더군요. 바로 저거야! 그런 거죠. 그 다음 사람들이 자기 설명하는데 다들 초등학교 졸업인 거예요. 그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기술로 승부하는 거죠, 기술자이니까. 이런 자기 존중감이 가장 중요합니다. 나중에 대학교 나온 사람들이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하고, 스승의 날에는 선물을 사오고 하니까, 이분들이 정말 우뚝 서게 된 거죠.


이 일 하면서 오빠 전태일 생각하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제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죠. 제가 여공이었고, 지금 만나는 분들이 다 오빠가 분신할 때 평화시장 공장 모퉁이에서 어린 나이에 그 일을 다 본 사람들이거든요. 오빠가 이 사람들을 더 이상 기계처럼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고, 그러니 저도 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죠.

그렇지만 저는 오빠처럼 살 자신은 아직 없어요. 오빠나 엄마를 생각하면 어떻게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자기처럼 사랑할 수 있었을까, 놀라고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좀 그렇습니다. 제가 언젠가 <전태일 평전>에 나오는 것처럼, 오빠가 생각했던 ‘모범기업’ 모델에 따라서 기업을 한 적이 있었어요. 하루 8시간, 일주일 40시간 노동, 주 5일제 근무를 한 거죠. 그러면 사람들이 행복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더군요, 자기들끼리 싸우기도 하고 저를 고발하기도 했어요. 그때 네가 전태일 동생이냐는 소리도 들었어요.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심판도 받아보고요. 그때 제가 너무 힘들어 하니까, 엄마가 위로하면서 마지막으로 물어볼 게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너 그 사람들을 사랑하니?” 저는 “엄마, 나는 그 사람들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했어요. 저를 너무 힘들게 하니까요. 그때 엄마가 그러더군요, “그럼 이제 더 이상 그 일 하지 마라.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냐.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계속 하고, 아니면 이제 그만 둬라.”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만 뒀어요.

그런 분들이 오빠고 엄마였어요. 이제 저는 그분들이 한 일과 다른 방식으로 일을 하고 싶어요. 오빠는 정말 냉혹하고 벽이 두꺼운 세상에서 혼자 힘으로 어쩔 수 없어 죽음으로 바늘 구멍만한 것을 뚫어 놓았고, 그래서 지식인들이며 사회에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죠. 엄마는 온몸으로 그 구멍을 넓혀놓았다고 생각해요. 투쟁하고 감옥 가고 경찰서에 360번이나 잡혀가면서요. 이제는 구멍이 넓어져 세상이 더 잘 보이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구멍을 통해 보여지는 세상에 필요한 것을 제도화 시키는 일을 하려고 해요. 그래서 국회도 들어 왔고요. 제가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는 게 참 좋아요. 오늘도 다른 장인 한 분을 인터뷰 하러 가야 해요.

한상봉 기자 /  뜻밖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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