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진 신부에게 길을 묻다

한국교회는 전례력에 따라서 매년 한 차례 가을초입에 ‘순교자 성월’을 기념하면서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삶을 우리시대에 어떻게 계승할 수 있을지 묻고 있다. 순교란 신앙에 따른 결정적 죽음이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연상시키는데, 한편에선 우리 교회가 ‘순교’를 너무 종교적 의미에서만 다루고 있는 게 아니냐는 반문도 있다. 그래서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신부가 처형당해서 유명해진 새남터 성당에 찾아가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 순교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복음 때문에, 또는 그 밖의 다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순교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라는 게 강 신부의 생각이다. ⓒ한상봉

사랑과 평화와 공존을 위한 순교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앞 한강변의 모래사장에 자리한 새남터. 지금은 주거지역으로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지만,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연무장(鍊武場)으로 쓰이기도 하고, 국사범 등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사육신도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주문모 신부뿐 아니라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 그리고 첫 한국인 사제였던 김대건과 현석문 등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그러나 강석진 신부는 대뜸 “순교보다 중요한 것은 순교자들의 삶”이라고 답했다. 순교란 결국 그분들의 삶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요즘처럼 종교에 대한 박해가 없는 시절에 ‘순교’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는 것이다.

강석진 신부는 오히려 ‘순교’란 말에 집착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이 말은 신앙인들만 알아듣는 ‘사투리’이며, 많은 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이를테면 2014년 여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한 시복미사에 대해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교황이 어떤 성대한 미사를 광화문에서 봉헌하고 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강석진 신부는 “이때에 순교자들의 시복”이라는 표현보다는 “신원”이라는 의미를 강조해야 옳았다고 믿는다. 순교자들의 죽음은 단순한 종교적 죽음이 아니라 국가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당한 이들의 원통함을 풀어주는 ‘신원(伸寃)’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순교자들의 죽음이 다른 이들에게도 의미 있게 해석될 것이다.

그리고 순교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복음 때문에, 또는 그 밖의 다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순교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라는 게 강 신부의 생각이다. 순교를 통해 전해진 것이 복음이기 때문이다. 강 신부는 이 복음의 정신을 “사랑과 평화와 공존”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지금은 사랑과 평화가 깨지고, 공존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를테면 교회가 한 사회 안에서 기득권을 갖게 되면서,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성지를 개발한다면서 타 종교와 갈등을 빚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이다. 순교 영성이란 “순교자들이 어떤 신앙을 받아들였기에 생명을 내어놓을 수 있었는지 묵상하는 것”이다. 하느님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고, 벗을 위해 죽는 사랑이다. “이 모든 것의 집합체가 순교”라고 했을 때, 우리는 이웃들 안에 포함된 타 종교와도 기득권을 내려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순교자 시복시성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한상봉
한편 강석진 신부는 그동안 교회사 이야기가 주로 신앙 선조들의 천주교 수용과 박해와 순교에만 집중하는 태도를 염려했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자들의 신앙적 열정과 용기도 중요하지만, 그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단지 순교자들을 얼마나 더 만들어낼지 관심 갖는 교회도 문제이며, 신앙인의 모델을 ‘순교자’로 제한하는 것도 문제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순교자가 아니면 대접을 못 받는 현실”을 문제 삼았다. 오래된 천주교 집안이라 하면 당연하다는 듯이 “순교자 집안이냐?”고 묻는 것은 문제가 있다. 초기교회에서도 순교자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열심 했던 교우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회 안에서 잊혀진 사람들도 많은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삶이다. 게중에 일부가 상황에 따라서 순교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최양업 신부가 죽을 때 푸르티에 신부가 종부성사를 줄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제 집을 내어준 교우들도 있었다.

강석진 신부는 이런 점에서 배교자와 밀고자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내어놓았다. 보통 교회에서는 배교자들을 취급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1791년 진산사건 때 배교했던 이들이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경우가 많다. 삶이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하느님 체험은 언제 올지 모르고, 사람은 변하기도 한다. 오히려 많은 교우들에게 1791년에 배교했던 경험이 1801년 다시 순교할 수 있는 영적 추진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상제사 금지령에 대하여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잘못을 시인한다면 이들 배교자들은 ‘원인무효’ 되어 배교자의 굴레를 아예 벗을 수도 있다. 실제로 대원군 시절 박해 때에는 배교 유무를 떠나 천주교 신자라면 무조건 죽이던 때도 있었다. 배교자로 순교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최해두 같은 이는 배교를 했지만 유배지에서 <자책自責>이란 책을 써서 하느님에 대한 깊은 체험을 나누어 주었다.

배교자와 구분되는 밀고자는 ‘교회의 원수’라 볼 수도 있는데, 게 중에는 엉뚱하게 하느님의 섭리가 나타난 놀라운 경우도 있다. 강석진 신부는 시복 재판 때 증인으로 나온 피영록 바오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1866년 순교한 정의배 마르코의 부인 피 카타리나의 조카인 피영록 바오로는 배교한 뒤에 3년 동안 포교들과 다니며 교우들을 색출했어요. 유다스가 된 거죠. 그걸 보는 피 카타리나의 마음이 오죽했겠나 싶어요. 그런데 종교자유가 생기면서 상황이 뒤집어져 천주교에서 ‘죽일 놈’인 된 피영록은 이름까지 이건하로 바꾸고 숨어 살았어요. 나중에 뮈텔 주교가 제8대 조선교구장이 되고 병인박해 때 치명한 이들의 시복 준비를 하자, 다시 교회에 나와서 그 당시 순교한 사람들을 증언하기 시작했어요. 이처럼 교회역사는 참 재미있어요. 오늘날 우리 잣대로는 배교자요 밀고자지만, 하느님의 잣대로는 다를 수 있어요.”

강석진 신부는 한국교회가 “순수하게 오로지 하느님만 믿다가 순교해야 순교자로 인정하려는 순수강박증”이 있는 게 아닌가, 물었다. 신앙의 순수성만 강조하다보면, 사실상 그렇게만 살지 못하는 이들의 삶과 순교자의 삶을 분리시키게 된다.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진흙탕 속에 있기 마련이라서, 신앙인들의 다양한 삶의 굴곡들을 살펴보고 헤아려야 한다는 뜻이다. “박해상황에서 빚어지는 순교든 배교든 밀고든 내 삶과 끊임없이 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해야 ‘순교’가 현실로 다가오는 법이다. 그들의 신앙을 통해 내 신앙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200년 전에 죽은 순교자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시복시성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그분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강 신부는 마무리했다.


한상봉 기자 /  뜻밖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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