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성금요일 십자가의 길, 용산참사 현장에서 열려..

 

사진/김용길
4월 10일 성금요일 용산참사 현장에서 300여 명의 가톨릭신자들과 시민들이 모여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이날은 문정현 신부(전주교구), 오기백 신부(성골롬반외방선교회), 김연수 신부(예수회)가 신자들과 동행했다. 

십자가의 길을 떠나면서 "잘 사는 나라만을 위한 개발에 맞서다 희생되신 분들과 그들의 아픔에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자 한다"고 취지를 밝히고, "이 참사가 우리들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잊지 않게" 해달라고 은총을 빌었다. 

참사현장에서 시작된 십자가의 길은 골목과 골목을 돌아 한때는 행복하게 웃음짓던 일터를 상기시켰다. <십자가의 길 1처>에서는 "재벌과 용역 그리고 공권력이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던 이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면서 "그들의 부당한 사형선고에 저항하다 희생당한 영혼을 위로"하시라고 빌었다.

<제2처>에서는 "내 삶의 멍에는 왜 이다지도 무겁고 힘겹기만 합니까?"라고 하소연하면서 "정말 휘어져 꺾여버릴 듯 고통의 연속뿐인 생활들. 고개들어 바라보니 십자형틀 지고서 당신 함께 가시나이다"하고 고백했다. 계속 이어지는 십자가의 길은 고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하나 하나 되짚어보면서 그들의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고 양회성씨는 여기저기서 빚을 얻고 전재산을 털어 넣어 용산에 복집을 차렸습니다. 두 아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식조리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만간 온가족이 함께 가게를 운영하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철거와 재개발은 평생의 꿈을 바로 목전에서 앗아가는 절망적인 일이었습니다. 평생 요리만 알고 살던 양회성씨는 하연 조리사 복장대신 파란색 우비를 입고 망루에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장성한 두 아들 중 둘째 는 2주 전 추모대회에서 경찰방패에 맞고 바닥에 깔려 무릎연골이 파열되었습니다. 무릎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목발을 집고 아버지 곁에 있겠다며 영안실로 돌아왔습니다."

사진/김용길

<제6처>에서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예수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하면서 "세상의 정의와 겨레의 통일을 위해 일하는 이들을 비웃고, 노동자·농민·도시빈민들의 몸부림을 외면할 때 유심히 살펴보니, 피땀으로 울부짓는 당신 얼굴이 거기 함께 계셨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그리고 <제8처>에서는 "의인의 고난에 함께 슬퍼하고 울어주는 자, 가진 것도 힘도 없는 민초들 뿐이구나. 사람들아, 나를 빼앗겼다고만 생각하지 말라. 너희들 자신이 내 몸이 되어라"하는 예수의 전갈을 선포했다

<제13처>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묵상했다. 
"이제는 잃어버린 꿈. 만사가 허무하다. 빈하늘만 쳐다본다.
그래도 산자는 죽은자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사랑하는 님의 주검을 내 손으로 거둔다.
산 사람은 울면서도 밥을 먹어야 한다.
아이들도 챙겨야 한다.
내일도 해는 다시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

사진/김용길

마지막 <제14처>에서는 "주님, 당신은 가셨으나 우리는 당신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무덤이 고요함은 당신 생명이 이미 우리에게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내 몸을 드리오니, 주여 일어나소서. 부활하소서. 그리하여 저 광야로 나가 다시 시작하시옵소서" 하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이날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잠시 길을 멈추고 묵상하고 마음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그 사이에 청주에서 찾아온 예술공장 '두레'의 진혼춤과 춤꾼 김미선 씨의 살풀이춤이 있었고, 서정숙의 춤 '아리랑'이 공연되었다. 십자가의 길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선 대구에서 온 노래패 '좋은 친구들'의 공연도 곁들여졌다. 그리고 이원규 시인이 고(故) 김남주 시인이 광주항쟁을 노래한 '학살'이라는 시를 두고 다시 읽은 '학살'이라는 시를 낭독했다.   

 

▲ 이원규 시인이 '학살'이라는시를 낭독하고 있다 (동영상/최금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1월 어느 날이었다
2009년 기축년 설날을 닷새 앞둔 1월 20일이었다
30년 전의 광주, 1980년 5월 어느 날과도 같은 아침이었다

새벽 6시 나는 보았다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경찰 특공대들을
새벽 6시30분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약탈자와도 같은 일단의 무장 특공대원들을
아아, 아침 7시20분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정권의 앞잡이, 자본독재의 소모품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새벽이었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아침이었던가

 

 

 

 

 

 

 

 

1월 어느 날이었다
2009년 기축년 설날을 닷새 앞둔 1월 20일이었다
30년 전의 광주, 1980년 5월과도 같은 아침이었다

아침 7시
용산은 벌집처럼 쑤셔놓은 붉은 심장이었다
아침 7시20분
용산 남일당 건물은 용암처럼 치솟는 학살의 붉은 탑이었다
아침 8시
바람은 살아남아 체포된 농성자들의 울부짖음을 날리고
아침 9시
햇살은 불에 탄 철거민들의 한 서린 눈동자에 머물고
2009년 1월20일 용산
학살자들은 어디론가 시신마저 빼돌리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아침이었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하루였던가

 

 

 

 

 

 

 

1월 어느 날이었다
2009년 기축년 설날을 닷새 앞둔 1월20일이었다
30년 전의 광주, 1980년 5월 어느 날과도 같은 아침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하늘은 붉은 핏빛의 천막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한반도 남쪽은 한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다
그날 아침 이후부터
북한산과 모든 산들은 그 옷자락을 말아 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고
그날 아침 이후부터
한강과 더불어 4대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 버렸다

4월 어느 날
2009년 4월10일 오늘 오후 6시 지금까지도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책임지지 않았다 처벌되지 않았다
장례식도 치르지 모한 유족들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마저 진압과 구속의 대상이 되었다

역주행의 한반도여!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 이렇게 처참하지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 이렇게는 치밀하지 못했으리

 -이원규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